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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r 21. 2024

무너져서야 볕이 다가오고

5학년 7반 국민일기



시어무이는 유리 같은 분이었다. 얇은데 깨질 때 소리가 크고, 파편은 아프고, 그렇기에 건드리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점점, 점점 약해져 갔다.

시어무이 방이 있는 아래채에 둥근 쇠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역한 냄새가 나를 직면한다. 불 켤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어무이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는 방 한가운데 냄새와 함께 방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밤낮으로 이불에 실수를 하여 내 손이 마를 날이 없다. 어무이는 그럴 때면 앙상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보았다. 깔끔하고 야무진 분의 뜻대로 시간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세월의 무게에 한없이 허물어져가고 있다. 얼라가 된 어무이를 키울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면 안 되었다.



여섯 번째 육아는 여태의 육아와 비교되지 않게 어려웠다. 고된 건 여태의 육아와 그대로인데 방긋 웃어주는 미소도, 분내 나는 피부도 없다. 어둡고 축축한 방에서 밥을 주는데도 점점 말라 가는 이상한 육아를 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총기도 잃어서 말과 행동도 어눌해져 갔다. 내가 일하러 가기 전에 기저귀를 채워두고 가면, 돌아왔을 때는 그 기저귀가 밥상 위에  올려져 있곤 하였다.


내 손으로 씻겨주고 입혀주고 먹여주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어느 날. 맑게 개인 하늘만큼 어무이 눈에도 이상하리만치 맑음이 가득하였다. 마치 잘 닦인 유리창처럼...


"애미야 내가 고생시켜서 미안타. 고맙데이..."



유리로 만들어진 거울과는 악수를 할 수 없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면 거울은 왼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어무이는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찰싹 내치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거울과는 같은 크기의 손을 맞댈 수 있다. 그날 어무이는 처음으로 내 손을 맞잡아주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서늘한 조우는 유리처럼 내 마음을 반짝이게 했다. 유리조각에 의해 났던 흉터들마저도, 차가운 유리의 감각을 꼬옥 감싸주었다.



어른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거꾸로 가는 인생사...  아이가 되어서야 솔직해진 어무이를 키운 보람이 있었다. 다 무너져간 시어무이 성벽 위로 푸른 민들레가 핀다. 그 고생을 했지만, 다 무너져 내렸기에 민들레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리라.



P.S

 이따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실화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늙어 죽는 것이 갓난아이가 되어서 죽는 것과 닮았습니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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