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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ul 04. 2024

겨울공방

3학년 6반 국민일기



 하얀 겨울과 신선한 겨울바람 냄새.

소매 속에 숨은 손이 느끼는 솜옷의 촉감과 여남은 새들이 내는 작은 소리들.

 많은 것들이 겨울이 깊어졌음을 증명하지만 우리 집의 아이들은 맛으로 겨울과 함께했다. 겨울에 태어난 나는, 아궁이와 함께 한 그릇의 겨울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궁이 건너 안방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흥성흥성 떠들고 있고, 그 높은 소리들을 들으며 김칫독의 살얼음을 깬다. 국그릇으로 백김치를 푸는 동안, 아궁이는 재가 되도록 아이들이 먹을 고구마를 익힌다.

 내가 문을 열자 방문 너머의 떠드는 소리가 급격히 조용해지고, 둘러앉은 식구들이 고구마를 한 덩이씩 집는다. 누구는 물고구마를 누구는 타박 고구마를 후후 불어가며 삼킨다. 고구마 옆에는 물김치가 사이다처럼 한 잔씩 있다. 목구멍이 뜨거워질 때 살얼음 섞인 물김치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는데, 타박 고구마가 걸린 애들이 조금 더 자주 마신다. 불 켜진 안방은 애들과 지아비와 시어무이랑 나를 한 입에 넣고 전구가 꺼지고도 비바람을 대신 맞아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 나는 새벽에 몰래 나와 아궁이의 장작을 새로 채워주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안방의 둥그런 전구 대신, 집 앞 골목 감나무에 주황색 전구 몇 개 달려있다. 안방 대신 붉게 가을을 켜고 있는 저 감나무가 마지막 가을을 알려주고 있다. 안방 전구나 홍시들이나 먼지가 뿌옇도록 이 시골의 밤과 가을을 지켜주는 작은 등대들이다.



 주황색 등대들의 안내에 따라 오늘은 겨울을 준비한다. 어느 집이나 김장하는 날에는 모이를 쪼는 부리들처럼 작은 입들이 우물우물거린다. 입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과 뭐라도 삶아내느라 훈훈한 김들이 마당을 뿌연 꿈처럼 만들고, 시어무이의 지휘하는 목소리가 내 꿈을 수시로 깨운다.

 마당 한켠에는 김치 장독을 묻을 땅을 파느라 지아비가 괭이질하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온다. 큰딸래미는 언제나처럼 내 숙제를 함께 터주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린다. 김장하는 날은 새벽부터 졸릴 새가 없다.


 반면 소금에 나른한 배추들은 추욱 쳐져 맥없이 쓰러져있다. 하얀 배추 사이사이에다 양념 버무린 무채를 섞으면 겉절이가 된다. 빨간 김치 말고 물김치를 먹으려면, 채썰은 빨간 고추와 무채를 배추사이에 끼워 장독에 차곡차곡 넣고 깨끗이 씻은 돌멩이로 사나흘 간 꾸욱 눌러놓아야 한다. 나흘이 지난 장독을 열고서 집안 우물물을 길어다 소금간을 하고 넉넉히 붓고 장독 뚜껑을 닫는다.

 지아비가 파놓은 곳에 장독까지 잘 묻고 나면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이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김치가 익어가기만을 기다린다. 짧아진 낮에 흰쌀밥과, 차디찬 초저녁에 홍두깨로 밀어낸 칼국수에도 상 위에 올라온 빨간 겉절이를 먹으며 겨울이 완연하기를 기다린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안방에 모여 흥성흥성 떠드는 하얀 겨울밤. 아궁이가 재가 되도록 아이들이 먹을 고구마를 익히는 동안 나는 김칫독으로 간다. 여러 겹 겉옷을 입은 장독 뚜껑을 열면 물김치가 자글자글 거린다. 물김치랑 고구마를 갖다 주면 우리 가족은 하던 말을 서서히 줄여가며 밤참을 먹을 것이다. 이런 나날이 겨울밤처럼 오래오래 길어졌으면 한다.


 애들이 떠나가면서, 집 앞 감나무에 주황색 전구가 줄어들 생각이 없다. 먼지가 뿌옇도록 이 시골의 가을을 알리는 저 이정표...

 마실 갔다 오는 지아비의 손에도 다홍빛 가을이 몇 개 들려져 있다. 맥박이 아직 살아있는 따끈한 겨울이 지아비와 함께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연분홍빛 물김치를 만들 때가 왔나 보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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