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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ul 18. 2024

리틀 포레스트 오브 그랜마

7학년 7반 국민일기



 우리 사위들이 내 딸들과 결혼하고 우리 집에서 처음 식사를 대접받으면, 높다란 고봉밥과 반찬들을 기꺼이 비워낸다. 차린 것도 없는데 맛있게 먹은 고마운 손님에게 물어보았다.

 "서방, 식혜 한 잔 하게."

 배를 두드리는 행동과는 다르게 "예, 좋지요."라는 대답이 음료처럼 시원하게 나왔다. 곧이어 사위에게 식혜를 주었을 때, 사위는 아까의 대답과는 조금 달리 당황한 눈치였다. 사위의 그릇에 담긴 식혜의 색깔이 붉었기 때문이다.


 사위가 생각했을 미색의 식혜는 감주라고 하고, 우리 동네에서 먹는 식혜는 빨간색이다. 색깔은 평소 보던 거랑 달라도, 한 그릇의 시원함은 어느 계절에서도 손님상의 마무리를 도와주었다. 밥솥은 모여 앉은 손님들을 생각하며 자글자글 단내를 풍긴다. 전기밥솥으로 밤새 기대를 끓이면 달큰한 냄새가 온 집에 진동한다. 일단 김을 좀 날리고 양은 찜통에 담아 바깥에 내놓으면, 지나가는 바람이 열을 식혀준다.


 매운 걸 못 먹는 손주들을 위해 감주의 반을 덜어두고, 이제 나머지 반으로 식혜를 만들 차례이다.

 무, 당근, 생강을 함께 채 썰어 커다란 그릇에 담아둔다. 설탕 조금만 넣고 버무리면 시간이 지나서 야채의 숨이 죽는다. 숨이 죽은 야채를 냉장고에 넣고 하루를 기다린다. 다음날이 되면 찬바람 실컷 쐰 감주에 채 썰어둔 야채를 넣는다. 마지막으로, 매콤한 맛을 위해 고춧가루를 채에 걸러 붉은빛을 내주면 완성이다. 손님이 올 때까지 감주와 식혜는 여름에는 냉장고에서, 한겨울에는 바깥에서 자신을 반길 젊은 외지인들을 기다린다. 



 아이들 신발이 현관에서 와글와글 서로 굴러대는 순간이면 우리 집 국자는 바빠진다. 크고 작은 아이들이 길다란 식탁에 바글바글 둘러앉아 한 그릇씩 시원함을 나눠 먹는다. 작은 아이가 먹는 감주는 그저 달큰하고, 큰 아이가 먹는 식혜는 고춧가루 덕분에 얼큰하고 깊은 맛이 난다. 식혜를 먹기 직전에 배랑 고구마를 채 썰어 같이 내면 더욱 아삭하게 씹히고, 화룡점정으로 볶은 땅콩을 식혜 위에 뿌리면 오독오독 고소하다. 특히나 한겨울에 냉장고보다 더 시원한 현관밖에 내어놓은걸 가져와 바로 뜨면 살얼음이 살짝 얼어있다. 야채 위에 살얼음이 혀끝에서 녹으며 씹힌다. 물맛밖에 안 나는 얼음이 식혜를 가장 맛있게 해 준다. 장모님의 정성이라고 사위들이 추켜세워줘도 가장 중요한 건 동장군님이 해준 거라 영 쑥스럽기만 하다.



 배 두드리는 사람한테 후식을 그렇게 먹여놓고도, 집을 나서기 전에 한 잔씩 더 먹이고, 김치통에 한 통씩 싸서 보내야만 내 마음이 편해진다. 엿질금이 끓을 때도, 냉장고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도 기쁘게 온도를 오갔던 건 나였나 보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음식 하나 더 하는 게 편한 서투른 사람이기에...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식혜 만들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 표현하는 법은 잘 익히지 못했다. 사랑한단 말도 어색하고, 사랑의 증거도 못 만들지만 추억 속의 한 그릇은 언제나 가득 채워져 아이들의 인생에서 해갈을 도와주면 좋겠다. 오늘도 전기가 뽑힌 커다란 밥솥에서는 투명한 단내가 난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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