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고백

8학년 2반 국민일기

 농부는 생각한다. 세상천지 절기만큼 솔직한 것도 없다고. 겨우내 모든 걸 얼려 버릴 기세이던 추위가 입춘 맞았다고 그새 사그라든걸 보면 말이다. 어느새 집 앞 논밭의 흙이 소리 없이 헐렁해지고, 햇살 한 뼘 들어갈 틈 사이로 초록의 숨결이 수북하다.

 정확한 절기에 맞물려 내 나이도 잘 굴러간다. 얼었던 땅이 녹아 부드러워져도 밭일을 나갈 필요가 없어졌고,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몰고, 경운기를 몰던 지아비도 이젠 없어졌다.

 지아비가 떠난 지 이제 2년째. 한 사람의 부피만큼 마음이 비어갈 때면 찾아오는 반가운 목소리들이 있다. 신발보다 현관문을 먼저 비집고 들어서는 목소리를 버선발로 나는 맞이한다. 평생 절기를 겪고도 나는 영 솔직치 못하다.

 '아이고, 내 잘 있는데 말라꼬 이래 싸들고 위험하게 차 몰고 오노...'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싫은 마음 때문에 버선발과는 모순되는 말이 먼저 나와버린다.

 얼굴을 보는 게 반가운 것 이상으로, 나를 보러 오기 위해 희생하는 것들이 너무 미안해서 찾아온 아이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지를 못했다. 그래서 서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평일 동안 일하느라 피곤한 자식들이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태평한 나를 보러 오는 게 영 과분하다. 아이들이 날 볼 수 있을 때 보려고 이런다는 걸 알아도 툭진 말이 먼저 나오는 걸 보면 나는 늘 부족한 엄마다.

 이 나이 먹고도 부족한 나를 위해서, 반찬들 바리바리 싸들고 온 귀하고 선한 내 딸...

 찾아든 큰딸에게 오늘만은 내 마음속에 있는 솔직한 말을 꼭 전하고 싶다. 평생 절기를 통해 배웠던 것처럼...

 "야야, 있잖아... 내 지금까이 살면서 너거 아부지캉도 잘 지냈지만, 자식들 덕분에 내 참 행복했데이...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너들이 내한테 잘해줘서 고맙고... 그르이끼네 나중에 내 죽더라도 절대로 울지 마래이. 니가 손톱만큼도 후회할 일 하나 없이 정말로 니한테 고마웠고, 내 행복하게 잘 살았다..."

 나의 고백에 설거지를 도와주던 수도꼭지가 멎고, 대신 딸내미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겨울처럼 갈라진 내 손등 위에도 절기에 맞는 봄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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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이글은 엄마가 큰언니에게 고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