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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Apr 02. 2021

에세이는 누구나 쓴다

에세이는 누구나 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쉽게 읽히지만, 또 그만큼 푸대접이기도 하다. 혹시 우리 자신을 출판사 편집자라고 상상해보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쏟아져들어오는 원고들의 대다수는 아마도 에세이일 것이다. 네임 벨류라고는 없는, 오로지 작가를 꿈꾸는 무수한 사람들이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어 출판사에 원고를 투척하고, 온갖 개인사와 잡다한 경험들로 채워진 그 원고들을 읽는 것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고역일 것이다.


우리는 소설가 김훈이 훌륭한 에세이를 썼다해서 그를 결코 에세이스트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조정래의 책 중에 가장 감명깊게 읽은 것이 "태백산맥"이 아니라 "황홀한 글감옥"이라 해서 그를 에세이스트라 여기지 않는 것처럼. 


하물며 6학년 우리 딸이 다니는 영어학원에서 써온 다섯줄짜리 영작문도 '에세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아무나, 언제나, 어디서나, 에세이를 쓴다. 그래서 에세이인거고, 우리가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까닭이다.



개인의 경험이 글이 될 때, 중요한 것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그러나 저건 질문이 잘못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옳다.


우리는 막연히 글을 잘 쓰면 되겠지 생각한다. 정말로 글 자체를 감칠 맛 나게 쓰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글을 주무른달까. 글의 감각이 있고, 글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 사물과 풍경과 경험의 일들을 글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들을 '타고난 문장가'로 여기며, 그들의 절반은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라 나는 믿는다.(연습해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다.)


여하튼 경험이 글이 되는 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우선은 좋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그 경험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아마도 에세이스트의 능력이 될 것이다. 글이 자랑이 되지 않고, 뽐냄이 되지 않고, 격정이 되지 않고, 신세한탄이 되지 않고, 구질구질하지 않고, 남에게 해가 되지 않고, 나는 이런 경험을 하였고, 참 좋았으니 너도 해봐라 식의 꼰대투가 되지 말아야 하고... 등등


나는 좋은 경험을 많이 해본 사람이 좋은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좋은 에세이스트는  자신이 했던 좋았던 경험을 허투루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경험이 메시지다. 

"주제"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대화나 연구 따위에서 중심이 되는 문제 또는 예술 작품에서 지은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사상"을 말한다. 주제의 뜻이 이와 같다면 에세이의 주제란, 에세이를 쓰는 사람, 즉 무언가를 경험한 자가 그것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하는, 또는 전하려고 하는 문제나 사상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문제나 사상 대신 "이야기"라는 말도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에세이니까.)     


여기 수많은 경험들이 있다.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들이 했던 수많은 좋은 경험들이 곧 그들이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 메시지가 내가 했던 경험, 또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경험과 어떤 접점에서 만날 때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동하고 그래 맞아!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앗, 나.오.이 중간점검을 잊을 뻔 했다. 이거 때문에 쓰는 글인데...


나.오.이에서 던지는 나의 메시지란 별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기행(문 형태의) 에세이"에서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은 두 개 밖에 없다고 생각하다. 더 정확히는 그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한다.


동기를 부여하거나,

대리만족을 하게 하거나.


첫번째,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란 내 글과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나도 여기 한 번 가보고 싶네 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글에 쓰인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그런 기분이 들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일 뿐, 사실 나도 나이 들어가면서 자꾸 내 얘기를 하고 싶어지니까 쓴 거고, 읽는 분들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리 신경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들이 한번이라도 "나도 시간을 내어 낙산 한번 가보고 싶네!" 그런 기분이 들었다면 나는 그들에게 충분한 메시지를 건넨 것이고, 이미 가보신 분들이라면 그가 그의 기억들을 나의 경험을 통해 다시 끄집어내어 볼 수 있도록 도화선(?)이 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두번째, 대리만족. 사실 이게 크지. 우리가 기행에세이를 읽는 까닭은 기행에세이를 쓰는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쩌면 이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별로다. 나는 내 글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내가 한 경험만으로 대리만족에 그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마추픽추나 갈라파고스, 남극이나 캄차카 반도에 대한 기행에세이를 쓰지 않는 까닭이다. 결코 그곳들을 못 가봐서 안 쓴 건 아니라는 얘기다.


어떤 분이 한양도성 순성을 열 두번쯤 해보신 분이라 해도, 그가 본 한양도성과 내가 본 한양도성이 같을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에세이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나의 글을 읽고, 나의 그림을 보고 다시 한양도성을 순성한다 해도, 그가 본 것은 여전히 내가 본 것과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다시 본 것은 그가 이전에 보았던 것과 분명 다를 것이란 말이다.


글쎄, 내 개인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사는 장소, 우리가 보는 풍경이 한층 더 흥미진진해지지 않을까. 

아마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에세이스트의 한계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도 결국은 글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에세이스트의 숙명이고, 동시에 나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 나는 생이지지하게 태어나지 못했냐고, 자식 둘을 키우는 입장에서 원망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치고 또 고치고, 그렇게 고치면서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수 밖에... 의지가 굳세서가 아니라, 원래가 그 방법밖에 없다.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가느다란 풍파쯤은 어찌어찌 겪어낸 중년 포스로 살금살금 해가야겠지. 중년의 최대 장점. 여유 아닌가.



나의 아지트, 백사실  /  이호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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