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정 Apr 04. 2021

오늘도 퇴고 중

부제 : 고치는 괴로움에 관하여

"퇴고"라 쓰고 "고통"이라 읽는다. 

브런치를 알게 된 건 훨씬 전이지만,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된 건 순전히 "퇴고" 때문이었다. 나는 답사를 하면서 글이 아닌, 그림을 먼저 그렸다. 원래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책에 넣을 그림 스타일을 확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급한 일이었다. 그림 스타일을 확정하다니, 저 사람은 그림을 이런저런 스타일로 맘껏 그릴 수 있는 사람인가 보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여하튼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게 된 후 그제야 글 작업을 하면서 그냥 글을 쓰는 것과 책을 염두하고 쓰는 것이 너무 다른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빠진 원고가 반의 반도 넘어서 써 놓은 글을 모아서 책을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책이 될 것을 정해 놓고 쓰는 글이라면 모를까...(대부분 기성 작가들이 하는 방식 아닌가. 연재.)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원고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1부 약 70,000자, 2부 약 76,000자의 초고를 쓰고 그걸 지금 고치고 앉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퇴고는 초고를 고치는 일인데, 찾아보니 퇴고의 3원칙이니, 퇴고 잘 하는 방법이니, 그런 글들이 꽤 있어서 나도 읽어보았다. 그러나 대충 감이 오지 않는가. 글 잘 쓰는 방법에 대한 수만가지 조언이 있지만, 결국 그 수많은 조언들의 결론은 "많이 써 봐야 한다"는 거고(그건 6학년 우리 딸도 알아!), 그건 퇴고도 마찬가지여서, 좋은 퇴고를 하려면 "보고 또 보고(내가 무척 좋아했던 드라마다)" 하면서, "고치도 또 고치고"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니까 보통 3번 이상 고친다고 한다.) 


나는 아직 책 한 권 출간 못해 본 사람으로서 이런 글 쓸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시행착오는 겁나 많이 해본 시행착오 전문가로서, 책이 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지금도 퇴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누군가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나의 경우"를 몇 자 끄적거려 보려 한다. 


부디 "퇴고의 3원칙" 보다는 쓸모 있기를 바라며. 



글의 메시지에 관하여

이것은 퇴고의 과정이 아니라, 초고 단계부터 더 깊게 고민해야 했던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방대해진 초고를 고치는 중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기회요, 찬스인 것 같다. 어떤 글을 읽을 때 글쓴 이의 의도가 잘 느껴지지 않고, "뭔 소리 하는 거여?"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여?"하는 기분이 들 수 있다. 내가 쓴 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이 글의 주제는 뭐, 뭐, 뭐 입니다"라고 수능 볼 것도 아닌데 요약정리를 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그건 저자의 경험이 메시지로 온전히 전달되지 않은 거고, 메시지는 글로 표현되므로 글의 문제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에서 메시지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건 두 가지 경우가 아니겠나, 하고... 


메세지가 진짜 없거나, 너무 많거나.


그러나 메시지가 없는 글은 없다. 뭔가에 가려져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도데체 무엇에 의해 가려져 있고, 무엇에 의해 흩어져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퇴고의 과정에서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문체가 너무 구구절절했는지, 인용된 타인의 글이 너무 많았은지, 대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음에도 개인의 서사가 너무 들어갔든지, 한양도성은 이어져 있지만 나는 한편 한편의 에세이가 독립된 글이 되기를 의도하며 쓴 것이 전체의 흐름을 뚝뚝 끊어 놓은 것이 아니었는지, 꼭 안들어가도 되는 문장을 너무 잘 써진 문장 같아서포기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던 건 아닌지, 결정적으로 글이 영 별로인 건지(이건 못 고쳐)... 하다하다 선무당이 장구 탓 한다고 애초에 한양도성과 역사적 장소라는 소재가 너무 진부했던 건 아니었는지, 더구나 전업주부 아줌마가 애 둘 데리고 다니는 컨셉이라니...!  


무엇이 메시지를 가리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메시지가 흩어져 있는가. 안 보였던 것은 드러내고, 너무 많은 것들은 일이관지로 모아 깃털처럼 보여줘야 한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라서 극적인 돌아섬의 장치가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금세 도착한 7022버스를 타고 서촌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올라갔습니다." 정도다. 한 템포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텐션이 떨어지면 나의 에세이는 읽는 이를 7022버스에 실어 자하문고개로 함께 태워가는 것에 실패할 것이다.


나는 책 전체의 메시지는 구름 위에 띄워 놓고, 한편 한편 에세이에서 각각의 작은 메시지들을 드러내기 위해 앞에서는 던지고, 뒤에서는 받는 식으로 했지만, 중간에 사족이 늘어지면서 글은 텐션을 잃고, 메시지는 갈 곳을 잃은 것 같다. 


문체가 너무 다정(?)했던 것도, 초장부터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개인사가 많았던 것도,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 어쨌든 소리내어 읽을 때 잘 갈린 스무디처럼 스무스하게, 격정 없이, 넘어가야 한다. 타인의 격정은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덜 갈린 ABC쥬스를 밀어넣다가 목구녕에 걸리는 고통을 맛봐야 할 것이다.



제목에 관하여

어디선가 제목과 목차는 출판사에서 숙련된 담당자들이 정해주니(출간이 약속된 경우) 저자는 그리 고민하지 말고 일단 내용에 충실하라, 뭐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나는 좀 갸우뚱이다. 내가 쓴 글은 제목이고 뭐고 한 글자도 남이 손댈 수 없어! 왜냐구! 내 글은 소중하니까! 그런 차원이 결코 아니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만, 여하튼 저자는 누구보다 책의 제목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쓰는 글 전체에 영향을 주므로.


에세이에 형식은 없지만, 트랜드는 있다. 그리고 에세이의 트랜드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게 바로 제목 같다. 에세이라는 것이 내용에 구애됨이 없어 그런가, 제목만큼은 확실히 트랜드다. 아, 물론 내용을 이루는 소재의 트랜드도 분명 있다. 요즘 같으면, 퇴사라던가, 비혼이라던가, 더 이상 참지 않겠다, 뭐 그런 거. 해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떤 형태로든 덩어리져 있기 마련이기에 그런 심리를 풀어제껴 녹아내리게 하는 매력적인 제목이 분명 있다. 제목만 봐도 떨린달까. (라고 쓰고 '사고 싶어진달까'로 바꿔 읽는다.)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멋진 제목의 책은 강신주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이다.

죄송하게도 "매달린"이라 줄여부르고 있지만.

예를 들어, "여보, 그때 자기가 가져갔던 "매달린" 그 책 어디다 뒀어?" 이런 식으로.


제목은 광고의 카피에 가까워서 그것을 정하는 일은 확실히 전문가의 역량에 좌우되는 것 같다. 요즘 에세이의 제목은 길어지고, 하나의 완결된 문장형태가 많다. 퇴고의 과정에서 글의 메시지가 각 제목에 응축될 수 있도록 일단 전체 제목, 부제목, 본문의 작은 제목까지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비록 내가 지은 제목이 출판시장의 트렌디한 감각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글의 맨 처음 제목은 저자 스스로가 지어야 하지 않겠나.


// 계 속 //




중명전  /  이호정 그림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는 누구나 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