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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May 07. 2021

글 쓰는 뇌, 그림 그리는 뇌

 누가 물어본 건 아니지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서너 해를 보내오는 동안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이 뭐였던가 생각해보면, 언제나 글을 쓰고 나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딱 그 순간이었다. 이를 테면 모드를 전환하는 것인데, 요즘 기계들은 워낙 기술이 발전해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다 되던데, 사람은 기계가 아닌지라, 모드 변환이 좀처럼 빨리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인간의 뇌라는 것이, 하나의 뇌가 전체의 일을 종합해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전두엽은 전두엽의 일을, 측두엽은 측두엽의 일을, 후두엽은 후두엽의 일을, 또 뇌간은 뇌간의 일을, 또 뭐가 있지?(ㅋㅋ), 암튼 정해진 부위가 정해진 일을 수행하기 때문에, 뇌의 특정부분을 다치면 그곳에 해당하는 정신능력이나 신체활동만 퇴화되고 급기야 멈춰버린다는 사실이 늘 신기하고, 놀라웠다.


 확신하건데, 글을 쓰는 뇌도, 그림을 그리는 뇌도 부위가 달라서, 나는 글을 쓸 때는 잔잔한 음악이 좋고, 그림을 그릴 때는 시끌벅적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이 반대의 경우는 불가하다.) 즉, 서로 사용하는 뇌의 부위가 다른데다, 혹시 이 두 부위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 이렇게 글에서 그림, 또는 그림에서 글로 모드를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6개월은 글만 쓰고, 6개월은 그림만 그리는 식으로 일을 해 왔다.(물론 6개월의 갯수는 그림 쪽이 훨씬 많다.) 그러다가 글이 한 템포 마무리되고, 슬슬 그림을 그려야 할 순간이 오면, 의복을 단정히 하고, 책상 주변을 말끔히 치우기 시작한다. 우선 널부러져 있는 책들을 원래 자리로 이동시키고, 화구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종이를 꺼내 잘 뜯은 후 앞뒷면이 바뀌지 않았나 꼼꼼히 살펴보고나서 제도판에 고정시켜 둔 다음, 정화수를 옆에 떠 놓고 그림 그릴 준비를 단단히 마친다.(실제로는 10분도 안 걸림.)


 그리고 그 앞을 왔다리 갔다리 하기도 하고, 흘끔 흘끔 훔쳐보기도 하면서,


 저 앞에 앉아야 하는데...

 지금 저 의자에 앉아야 하는데...

 아, 그림 그려야 하는데...

 아아, 오늘부터는 진짜 그려야 하는데...


 그러면서 몇 날 며칠을 그냥 보내버린다. 왜냐면 그림을 그려야 하는 그 순간이 정말이지, 싫기 때문이다. 막상 그림을 그리게 되면 세상 시름 잊고 그리는 데 열중하지만, 그림을 그려야 하는 순간의 부담감과 육체적 고통(?)이 그림 그리는 일을 늘 주저하게 만든다.


 사진을 보고 그리는 나의 그림에서는 '창작'이라는 위대한 여정은 제외되지만, 사진대로 그려야하는 기술적인 '노력'의 문제는 있다. 그러나 또 극사실주의 화가들의 놀라운 테크닉까지는 아니므로, 나는 사진을 보고 적정 수준에서 사실적으로 그려야하는 의무감만 남는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스케치를 정확히 하고, 그려진 펜 선 안에다가 최대한 꼼꼼히 색을 입히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나의 그림 그리는 뇌의 아주 작은 한쪽 구석, 저기 멀리, 어딘가쯤에 쥐톨만큼은 나도 아티스트로서의 필터를 장착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남은 15장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힘든 일을 기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 공통의 것 아닌가. 나에게 글 모드에서 그림 모드로 1초만에 변환되는 그런 날이 오게 될지, 아님, 그림 없이 글만으로도 괜찮을 그런 날이 올지(그것이 최종 희망사항이긴 하지만...ㅎㅎ), 잘 모르겠다. 그냥 사진을 스캔하면 내가 그리는 스타일대로 그림으로 변환되서 나오는 그런 기계를 누가 좀 발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숙정문  /  그림 이호정



// 마 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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