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동안은 빈 원고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원래 원고와 그림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한글파일에 덕지덕지 붙여 두기만 했던 초고(특히 2부에 해당하는 원고들)를 다듬고 손 보느라, 눈이 왔었는지 안 왔었는지도 모르고 겨울을 보내버렸다.
사실 이렇게까지 모든 것들이 늦어질 줄은 몰랐다. 다만,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따지고 보면 '늦어졌다'는 말도 그런 것이, 무슨 약속을 했어야 늦든지 말든지 하지...
지난 2월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올린 것도, 뭐랄까, 그런 기약 없는 일들이 힘에 부쳐서였다. 그러나 막상 브런치를 시작해 놓고도, 글을 꾸준히 올리는 것도, 다른 분들의 글을 찾아보고, 피드백하고, 그렇게 브런치 활동을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글과 그림을 공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비록 호불호는 있을 지언정, 누굴 비방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도 아니며, 그저 아이들과 함께 답사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쓰고 그린 건데, 오히려 그래서였다. 동굴 속에서 들어앉아 글만 쓰고, 그림만 그리다가 막상 던져놓고(?) 보니, '여기가 어딘겨? 오늘이 며칠인겨?' 그런 기분이었다.
트렌디하지 못한 긴 글, 역시 트렌디하지 못한 그림, 관심을 끌기는 그른 주제까지... 애초에 관심을 끌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나, 적금 깨서 책을 만들려던 계획을 싹 지워버리고 나니, 출판사를 찾아 책을 내야 하는 산 하나가 눈앞에 턱 나타난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겨울내내 남은 원고와 씨름하다가 올 4월쯤 되어 겨우 퇴고작업을 마치고, 어찌됐든 빈 데가 없는 한 세트의 원고를 가지게 되었다. (완성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싶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2부 원고에 들어갈 33장의 그림 중 정확히 15장의 그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줄이고 줄여 11장만 그릴려고 하다가, 결국 15장이 되어 버렸다. 나는 보통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평균 5~7일쯤(양쪽 큰 그림은 열흘에서 2주 정도) 걸리는데, 문제는 5일을 그리면 5일을 쉬어야 하고, 14일을 그리면 14일을 쉬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늦어진' 이유가 바로 그거다.)
그런 내가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15장의 그림을 그렸다는 건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징글징글한 수렁에서 어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책의 가능성을 지닌 원고와 그림 한 세트를 손에 쥐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일을 했다. 3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지금은 좀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이 내가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했었어야 할 트레이닝의 시간이었다고 믿는다. 진심으로...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나는 결코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훈장님댁 서당개처럼 3년이면 될 거라 생각한 게 불찰이었지.
이젠 브런치에 이런 저런 글도 올리고, 다른 분들의 글도 찾아 읽고, 사두고 읽지 못한 책도 읽고 싶다. 집안 청소도 좀 하고, 애들에게 신경도 더 쓰고, 남편 아침 밥도 좀 차려주고, 살도 빼고, 요가도 다시 시작하고, 피부관리도 하고, 할 게 많다. 물론 그 전에 '투고의 산'을 또 넘어야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확실히 깨달은 건, (적어도 내 기준에서) 글 쓰는 건 진짜 안 느는데, 그림 그리는 건 진짜 는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라 그런가. 나의 마지막 그림. 백석동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