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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Mar 08. 2021

저녁에 쓸 두부나 사러온 사람처럼

다산동 성곽마루에서 이간수문까지

다산동 한양도성  /  이호정 그림



 다산동 성곽길을 따라 사뿐사뿐

 지하철 6호선으로 갈아타고 버티고개역에 내리니 높이가 까마득한 에스컬레이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그곳을 ‘공포의 에스컬레이터’로 기억하고 있어요. 스르륵 움직이는 계단에 올라서며 아이들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얘들아, 꽉 잡아.”


 구릉지 옹벽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단지를 지나 고급주택과 구옥들이 섞인 오르막길을 낑낑거리며 오르자니 아까 내린 지하철역 이름이 ‘버티고개’였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지 싶습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 김밥과 오렌지 주스를 내려놓고 다산동 성곽마루에 철퍼덕 앉았습니다. 한여름 남산 자락의 무성한 녹음 사이로 눅눅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번 답사는 다산동 성곽마루에서 광희문을 지나 이간수문에 이르는 3km 남짓의 길입니다. 다산동 성곽길은 저도 처음 와본 곳이라 어떤 풍경과 마주하게 될지 내심 기대가 됩니다.


 한양도성 안길로 들어서니 빼곡히 들어선 다산동 주택가와 아파트단지의 풍경에 한눈에 들어옵니다. 바깥 길로는 오래된 성돌들이 높고 낮은 지형을 따라 조각보처럼 이어지고 있지요. 성곽 안길은 내리막길인데다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여장 너머로 시원하게 트인 전망 때문에 걷는 맛이 일품입니다. 


 신나게 걸어 내려가다 바깥쪽 성곽길이 궁금해지려는 찰나, 때맞춰 암문으로 나가는 계단이 보여 여간 반갑지 않습니다. 암문 밖으로 이어진 샛길은 바람길인지 유난히 시원합니다. 할아버지 두 분이 터줏대감처럼 앉아계시고, 드문드문 운동복을 입은 동네 사람도 지나갑니다. 아이들이 녹슨 운동기구에서 잠시 노는 사이 저도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힙니다.


 다산동 성곽길을 느릿느릿 걸어 내려오면 닿을 수 없는 곳에 멀게 나앉은 것도, 번화한 시가지 복판에 시끌벅적하게 자리 잡은 것도 아니어서, 원래부터가 동네의 일부인 양 다정하게 느껴집니다. 거주자우선주차장에 세워놓은 오토바이, 동네 마트 앞에서 막걸리 드시는 아저씨, 삐딱하게 선 전봇대와 복잡하게 엉켜있는 전선줄, 그렇게 한양도성과 나란히 이어지는 길가에서 저도 저녁에 쓸 두부나 사러온 사람처럼 어슬렁거립니다.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 외에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사람들의 등 뒤로 일상의 배경이 되어주는 한양도성의 존재가 결코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어디선가 날아든 벌 한 마리에 딸아이가 혼비백산 난리를 치는 중에 성곽은 동호로와 만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끊겨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광희문이 보일 때까지 한양도성은 주택의 축대로, 옹벽으로 겨우 흔적만 남겨 두지만, 그마저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멸실 구간이지요. 우리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한양도성 마크를 따라 금세 광희문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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