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호정 Mar 04. 2021

너보다 오래전부터 여기

성북쉼터에서 와룡공원까지

북정마을과 한양도성 / 그림 이호정



 성저십리와 북정마을

 우리는 두어 달 전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북정마을 곳곳을 답사했어요. 성북03번 마을버스는 비좁은 골목 사이를 경쾌하게 내달렸습니다. 아이들이 신이 났지요. 종점인 북정마을 노인정에 내리니 마을은 부슬부슬 내린 비로 차분히 내려앉았고, 색색의 슬레이트와 양기와를 얹은 지붕 위로 성곽이 저 아래부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노인정 앞 구멍가게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동네 분들, 싱그러운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 그리고 백악에서 뻗어 나온 산자락을 향해 시원하게 트인 전망까지…. 저도 웬만한 서울 동네들(?)은 다 다녀 보았습니다만, 진짜 서울이 맞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독특한 풍경이었지요.


 원래 조선 시대의 한양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도성 밖 십 리까지를 한성부漢城府*의 관할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이 성안에 거주했고, 성저십리에 형성된 마을이라도 성문 밖의 주요 길목이나 한강변에 집중되어 있었지요. 북정마을은 풍수상의 이유로 축성 이후 줄곧 통행이 금지되었던 숙정문 근처인 데다가, 성곽 밖으로는 지형이 험한 구릉지여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살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 도성의 방어체계가 재편되며 영조41년(1765) 어영청御營廳*의 북둔北屯이 설치되고 나서야 사람들을 모아 정착시킨 것이 마을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로 갈 곳을 잃은 피란민들과 지방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살 곳을 찾아 성곽 아래 집을 지어 살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지요.


 그때의 모습은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김광섭(1905-1977)의 시로 배우며 상상했던 산동네, 달동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포성이 메아리치는 산1번지 채석장도 간데없고, 성북동 비둘기도 몰라볼 만큼 세상도, 북정마을도 변하였지만, 옛 물길이 흐르던 말풍선 모양의 길을 따라 슬슬 걷다 보면 오래된 것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여전히 아련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너보다 오래전부터 여기

 야자매트가 깔린 오솔길이 끝나고 와룡공원으로 이어지는 나무계단입니다. 한 칸 한 칸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의 흔적들이 하나의 장면으로 모아집니다. 사람들은 말바위안내소 쪽으로 그대로 지나가고, 우리는 와룡공원 입구에서 멈춰 섰습니다. 여기서부터 백악 정상을 지나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단풍이 깊게 든 날을 잡아 볼 참입니다. 잠시 서서 크게 굽이지는 한양도성의 성벽을 따라 아이들과 걸어온 길들을 되짚어 봅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수려한 풍경과 한양도성의 유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붕에 덮어둔 천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눌러둔 기왓장들을 보며 문화재 주변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서울 같지 않다며 내지르는 감탄사와는 무관한 삶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오래된 돌들, 바람의 결대로 흔들리는 나무와 긴 시간을 함께 해 온 이웃이 있는 삶의 풍경이 낡은 성곽 아래로 다정하게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크고 작은 성돌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원래의 돌과 새로 올린 돌들이 저렇게 단단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결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되고, 내일이 지나면 다음 내일이 되는 반복 속에서 하루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왔습니다. 어딘가 의미 있는 것들로 충만한 시간이 있을 거라 믿으며….


 저기 보이는 돌들도 숱한 시간 속에서 그런 나날들을 보내왔겠지요. 그래서 땀과 상처투성이의 손들이 성돌 하나를 쌓아 올렸을 때, 그것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자랑스러운 문화재라는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무너지고 다시 쌓고를 거듭하며 내가 너보다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제야 시간의 한계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와룡공원으로 내려가니 잡목 덤불 너머로 서울의 도심 풍경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찾아가든, 우연히 만나든 거기서 우리는 무수한 시간과 수많은 사건을 지나온 서울의 옛 풍경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어떤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또는 학술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재를 탐방하러 가는 길만은 아닐 테지요.


 종로02번 마을버스는 감사원을 지나 북촌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내달립니다. 마을버스 안으로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교통카드를 찍으며 능숙하게 올라탑니다. 오랜만이네요. 여기 북촌도. 차창 밖으로 눈에 띄는 몇몇 풍경들이 그사이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다시 찾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곳을 훑고 지나갔을까. 그것도 길을 걷는 동안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우르르 내릴 준비를 합니다. 종로3가역이 지척이에요. 

 

 집으로 돌아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이전 02화 성북쉼터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