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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Mar 01. 2021

성북쉼터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성북쉼터에서 와룡공원까지

※ 브런치 북에 실린 글은 전체 글 중 일부만을 발췌한 것으로 

    내용이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성북쉼터에서  /  이호정 그림



 성북쉼터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이 이야기가 성북동 어느 쉼터에서 다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제 머릿속에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오래된 도시로서의 서울, 좋아하는 풍경으로서의 서울은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궁궐이나 널리 이름난 관광명소에서가 아닌, 낡은 성곽과 옛집들로 둘러싸인 여기 성북동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무더위도 한풀 꺾여가던 2005년 늦은 여름, 저는 옛 벗들과 함께 처음으로 성북동의 성곽, 지금은 ‘서울 한양도성’이라 불리는 길을 걸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지도 어느덧 5년여가 지나 더는 지하철 2호선을 거꾸로 잘못 탈 일도, 길거리에서 두리번대다 바삐 지나는 사람들에게 치일 일도 없을 만큼 서울살이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서울은 낯설고 어려운 곳이었어요. 그러다 성북동 성곽 너머로 펼쳐진 풍경 앞에서 그때까지 몰랐던 서울의 이면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친밀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벽 아래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 그 위를 에워싼 키 큰 나무들이 낮은 산등성이를 따라 기묘한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 아래 자랑스러운 역사도시임을 증명하고도 남을 대단한 문화재들은 많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성북동 한양도성 초입의 나지막한 여장女墻* 위에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모여 앉아 무료함을 달래던 동네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던 그 날, 그 모습은 하나의 장면으로 영구 저장되어 오래된 도시로서, 친숙하고 정다운 장소로서 서울을 떠올리는 첫 기억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성북동 쉼터에서 다시 시작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날 성곽 위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만 한 제 아이들을 데리고서 말이에요.     






 암문暗門을 지나 와룡공원으로

 성북쉼터로 되돌아오니 그새 모기에 물린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우리는 다시 성곽 안길을 따라 와룡공원으로 출발했어요. 쾌적하게 정비된 성곽 안길은 누구라도 좋아할만한 산책길이지요. 여장은 울타리가 되고, 숲은 그늘이 됩니다. 때 이른 너도밤나무 열매도 몇 개 떨어져 있어요. 얼마나 올라갔을까. 갑자기 나타난 놀이터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가고, 저도 놀이터 벤치에 잠시 걸터앉습니다.


 갈 길이 먼데, 그네 타는 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을 재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일이지만, 한편으로 아이들의 일이기도 하니까요. 남은 답사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그들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목적지가 바로 코앞이라도 쌩쌩 그네도 밀고, 미끄럼틀을 거꾸로 내려오며 깔깔거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딸아이가 주워온 너도밤나무 열매 한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립니다. 차고 매끈한 자연물 그대로의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집니다.


 놀이터를 나와 조금 걸어 올라가면 ‘암문暗門’이 하나 보일 거예요. 암문은 한양도성의 안과 밖을 오갈 수 있게 만든 비상문입니다. 후미진 곳에 한두 사람 겨우 오가는 작은 문이지만,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순성꾼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문입니다. 실제로 순성을 하다 보면 드문드문 만나는 암문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암문 앞에 서면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 싶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드는 이상한 문이기도 하지요. 그 암문을 지나면 한양도성 안팎의 여러 성곽마을 중 하나인 북정마을이 지척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오른쪽으로 북정마을을 끼고 오솔길과 나무계단을 따라 와룡공원까지 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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