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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Feb 22. 2021

오래된 길을 걷다.

낙산 가는 길  /   이호정 그림



 지방의 대학에서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그와 무관하게 통신사 고객센터 상담사로 취업한 것이 1999년 봄의 일입니다. 삐삐시대가 저물고 핸드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전화가 안 터진다는 항의로 콜센터의 하루가 시작되던 시절이었어요. 


 여느 때처럼 잔뜩 화가 난 고객님들과의 통화로 쩔쩔매던 중 서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핸드폰 너머로 그는 어색한 서울 말투로 “너 요새 뭐하니(↗)? 대학원 안 오니(↗)?”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했지요. 뒤에 무슨 얘기를 더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석 달 후 저는 고객센터를 그만두었습니다.


 2001년 1월 3일 양손 가득 짐 가방을 들고 강남터미널에 내린 저는 신림동 선배언니의 반지하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호선 신대방역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가야 했던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고, 학교 후문에 자취방을 구해 거처를 옮겼지요. 그 후로 친척네로, 또 다른 선배언니집으로, 다시 홀로, 1년에 한 번꼴로 여섯 번의 이사를 더 하고 나서야 ‘돌마리’라는 옛 지명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은 송파의 작은 빌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1층 공용현관을 나서면 ‘백제초기 적석총’이 지척이었던 그곳에서 꼬박 8년을 살았던 건 오랫동안 전세금을 올리지 않았던 주인아저씨 덕분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곳이 저의 신혼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에서의 15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앞의 절반은 미혼자로, 뒤의 절반은 기혼자로 약속이나 한 듯 채우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사할 날을 기다렸지요. 그러나 서울을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익명과 익숙함에서 비롯된 삶의 관성이, 서울을 ‘서울’이라고 부를 때의 떨림이 제게는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미련이 없다는 것도, 아쉽지 않다는 것도, 사실은 좀 지긋지긋했었다는 것도 다 거짓, 저는 제대로 떠나지 못한 채 서울과 도로 하나를 마주한 곳에 눌러앉고 말았습니다. 마흔이었어요.


 처음 살아보는 새 아파트, 낯선 환경이 주는 설렘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근근이 해오던 일까지 그만두고 나니, 저는 등 번호만 바꿔 달고 비슷비슷한 주자들에 떠밀려 다시 출발선상에 선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우르르 달리다 보면 어디선가 더 크고 아름다운 파랑새가 나타나겠지. 그러나 파랑새는 ‘저기, 멀리’가 아닌 ‘지금, 여기’ 있다는 이 사랑스러운 동화의 결말처럼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익숙한 모습으로 제게 왔습니다. 서울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 길을 다시 걷는 일이었어요.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앞으로의 제 삶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도시의 역사 환경이나 경관을 공부하던 대학원 재학시절, 동기의 소개로 시민단체 ‘도시연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에 도시에 관한 한 장의 스케치와 짤막한 글을 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3년 동안 “도시스케치”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사무국 활동가님으로부터 글을 더 써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던 것 같아요. 마침 직장생활을 하며 옛 벗들과 서울의 이런저런 곳들을 답사하며 지낼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보았던 오래된 풍경들은 언제나 탄성을 불러일으켰고, 놀라움을 주었고, 무엇보다 빠듯한 서울살이에 이리저리 치이곤 했던 제게 따뜻한 위안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 도시를 걷다”라는 코너로 시작된 첫 원고는 최순우 옛집과 성북동 일대의 서울성곽, 지금의 서울 한양도성이었습니다. 아직도 옛집의 삐거덕거리던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두근거림, 성곽의 낮은 담장 위에서 깔깔대던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생생합니다. 이후로 기관지가 재편될 때까지 8년여 동안 저의 답사는 두 달에 한 번씩 계속되었지요.


 서울 15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란, 그때 쓴 원고 중에서 한양도성 안팎의 것들을 그러모아 고치고, 빠진 부분을 채우고, 거기에 새로이 삽화를 그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책이 될 것을 염두에 둔 것도, 일관된 주제로 엮어 쓴 것도, 세월이 마냥 흐른 것도 아니어서 적당히 고쳐 쓰는 것으로는 될 수 없었습니다. 묵은 원고들을 들춰 보며 추억에 잠길 수는 있겠지만, 모든 원고가 현재의 시점으로 새로이 기록되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한편 더위가 막 시작되던 2017년 6월 3일, 아이들과 첫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부지런히 서울을 답사하고 돌아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란 다분히 예술의 영역이겠으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고된 육체노동과 다르지 않음을 절절히 깨닫던 시간이었지요. 새롭지도, 결코 독창적이지도 않은 이 그림들을 그리며 저는 아티스트였다면 개척해야 할 세계관 대신, 충실한 관찰자로서 어떻게 하면 사진과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릴 뿐, 그 안에 서울의 오래된 풍경들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제대로 된 책 한 편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글 쓰는 실력이 늘고, 그림을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되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된다는 것은 잘 쓰고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쓰고 매일매일 그리는 것의 다른 표현임을 지난 시간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그 한편의 책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일을 기대하며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했던 것뿐이었지요. 그 결과물을 내놓으려니 홀가분한 만큼의 두려움이 앞섭니다. 저를 모르는 누군가가 기꺼이 시간을 내어 제 글을 읽고, 제 그림을 보아준다는 것을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을까요. 


 확신하건데, 그들도 분명 길을 걷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찬란한 역사도시 서울. 그러나 차갑고 매정할 수밖에 없는 거대도시의 한 켜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버텨온 오래된 풍경들이 그에 걸맞는 존경과 찬사를 받게 되길 바랍니다. 그들은 제게 위로와 영감을 주었고, 종종거리던 서울 1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보았는데도 광화문광장에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화문과 그 너머 인왕산과 백악산의 모습을 바라보면 여전히 가슴이 설렙니다. 저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선상에 선 무수히 많은 자들 중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신호가 바뀌는 찰나에도 참으로 아름답다는 감동이, 대단하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돌이켜 보면, 서울 15년 동안 온전한 ‘나’로서 제게 남은 건 그 길을 거닐며 감탄하고 위로받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사실만이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시작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숭례문 가는 길 / 그림 이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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