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걷는 생각들> (23)
지난 몇 년간 나의 하루는 인왕산 자락길에서 시작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한 상황이 아니면 거르지 않았다. 산길 걷기는 상황과 기분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확고한 루틴이 되었고 이제는 몸이 먼저 그 시간을 기억하고 나를 재촉한다. 자락길을 따라 40분 남짓 걸어 구민체육센터에 도착하면 스트레칭과 가벼운 근육 운동을 한 뒤 샤워와 찜질로 땀을 한 번 더 낸다. 그러고 나면 하루를 대면할 몸의 준비가 끝난다.
걷기의 효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되었고 체력과 수면의 질도 좋아졌다. 하지만 이 일상이 내게 준 선물은 단지 건강만이 아니다. 새벽길 위에 서면 계절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사계절이 바뀌는 커다란 흐름뿐 아니라 기온이 1~2도 오르내리는 미세한 변화까지 몸이 예민하게 알아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경험은 흔치 않다. 바람결이 달라지고 햇볕의 각도가 조금씩 옮겨가며 나뭇잎의 색이 서서히 물들어간다. 그 과정을 매일 마주할 때 자연은 더 이상 정지된 배경이 아니라 교감을 나누는 상대가 된다.
이러한 섬세한 감각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바꿔놓았다. 작은 차이를 알아채는 감각이 자라나면서 큰 사건을 만나도 예전처럼 크게 요동치지 않게 되었고 마음도 조금씩 느긋해졌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제 속도에 맞춰 변화를 완성한다. 그 순리를 몸으로 배우다 보니 사회와 타인 그리고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조급함이 덜어지는 것을 느낀다. 기분이 흔들릴 때도 그 감정을 곧장 성급한 결론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늘의 불안이 내일의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마음의 여백을 갖게 된 것이다.
걷기란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동시에 마음의 결을 손질하는 시간이다. 걷는 동안 머릿속 소음은 발걸음에 맞춰 정렬되고 엉킨 고민은 실마리를 찾아간다. 때론 번뜩이는 답을 얻기도 하고 문제의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막막했던 걱정거리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바뀌고 복잡하게 뭉친 감정은 단정한 생각으로 풀려나온다. 해결책을 명쾌하게 찾아낸다기보다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에 대한 단서가 조금씩 잡힌다.
몸의 준비를 끝낸 뒤 도서관에 들르거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찾아오는 편안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을 비워낸 뒤에야 비로소 몸이 노곤해지며 스미는 평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순간이자 나를 보듬는 자리다. 이곳에서 오늘 할 일을 점검하고 우선순위를 매긴다. 먼 미래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앞날을 가늠하며 바쁜 일상 속에서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약속과 다짐을 다시 세운다.
나에게 인왕산 자락길은 산책로 이상의 의미, 즉 삶의 기준점을 세우는 공간이다. 무언가를 덧붙이는 시간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시간이며 그 덜어냄 덕분에 나의 하루는 좀 더 단정해진다. 매일 걷는다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반복이 나를 나답게 붙들어주는 단단한 힘이 되기에, 이 루틴은 충분히 소중하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늘 하던 방식으로 하루를 연다.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흔들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는 않을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