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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하다 Sep 27. 2021

저 곳 어딘가에 내가 있을 곳

15분 동안 스토리텔링




여기 도시에 조그마한 집들이 친근하게 마주 보며 모여있다. 옹기종기라는 진부한 표현을 빌려 표현하기에는 좀 더 큰 모양새이고, 시원스레 길게 뻗은 도로와 멀지 않은 곳을 지나는 하천은 갑갑한 마음을 시원스레 풀어 주기에 그럴듯한 풍경이다.



낮보다는 밤에 여유를 갖고 눈에 가득 담아보던 이곳이 익숙해지는데 1년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늦은 밤, 지하 주차장에 아리아를 대어놓고 곧장 발길을 돌린 곳은 짚 앞 편의점, 혼자서만 부담스러운 빛을 뿜어대는 간판에 급작스럽게 지어지는 찡그림을 풀 생각도 아니하고, 늘 같은 시각에 편의점 문을 열때면 "또 오셨네요!" 친한 척하는 알바생 얼굴을 마주한다.



코딩된 것처럼, 점원의 인사가 신호가 되어 늘 그러하듯 시크한 고개 끄덕임으로 대신하고, 늘 그러하듯 냉장고에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걸어가 익숙하게 문을 열을 찰나에, "아! 저기, 오늘은 코끼리표 맥주가 1+1 이예요!"라는 잡음을 강제 입력당한다.



버벅거리며 돌린 고개로 점원과 뜻하지 않은 시선을 마주치고 '한 캔이어도 충분히 취하는 데'라는 내뱉을 뻔한 말을 목구멍 속에 내리 눌러 놓는다. 늘 그러하듯 대답 대신 고개 끄덕임으로 대신한다.



공대 졸업생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성이 술 '주 씨'라는 멘트를 달게 듣던 가까운 과거와는 달리, 맥주 한 캔에 취하는 나는 커다란 눈이 반달로 변신하기를 지금 막 쓰레기통에 빈 캔이 들어갈 때쯤에 시작되었다.



하얀 얼굴에 붉은 얼룩이 내려앉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늘 수고가 많네요!"라는 한 톤 올라간 목소리에 보태어 "또 올게요!"라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리고 편의점을 나선다.



두 배쯤 늘어진 발걸음, 흥얼거리는 노래는 어딜 봐도 취한 사람 모습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아파트 입구임에도 정확히 다섯 번의 신호등 불빛의 교체가 있어야 겨우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늦은 시간이라 마주칠 사람 없을 것 같지만, 은근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들이 있을 때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조금 전 편의점 알바생처럼 친한 척 인사를 건넨다.



여태껏 와본 적 없는 도시에 빠른 적응을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적응을 도운 건, 나 스스로도 아니고 내 주변인들도 아니고 이 코끼리표 맥주 한 캔이다.



사는 게 왜 이렇게 부질없을까. 왜 이렇게 허무할까. 변화는 게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나. 하고 주문처럼 묻고 있을 때, 맥주 한 캔을 들이키고 도로 바닥까지 내려앉은 별처럼 여러 번 색을 달리하며 반짝이는 것을 눈에 담기를 한 번, 도착한 집의 베란다에 기대어 두 눈 가득히 담아보는 이 도시 풍경과 높이 떠 있는 별의 두 번이 불안한 자의 적응을 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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