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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팍크 May 31. 2024

14화. 역시 주량은 정신력인가


술을 잔뜩 먹고 들어왔다. 얼추 세어보니 2시간 반동안 소맥기준으로 한 10-15잔 정도를 연거푸 마셨구먼. 그런데 신기하게도 약간 알딸딸한 정도이고, 술도 깰 겸 배도 꺼트릴 겸 집까지 30분 정도 살방살방 걸어올 수 있는 아주 말짱한 정신이었다. 실은 심각한 코로나를 겪은 이후로 주량이 거의 바닥이 되었었다. 나는 코로나를 조금 심하게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신체가 겪을 수 있는 아주 다양한 문제점들을 한 번에 겪게 되었다. 그리고 주량에 미친 영향 역시 어마무시했다. 퇴원한 이후 이미 3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제 맥주는 2-3잔만 먹어도 취하는 것은 물론이요, 친구들과 먹을 때면 거의 뭐 젤 먼저 가는 건 나다. 망연자실하게도! 그런데 지난주 입사 이래로 일주일에 2번씩은 얼추 회식 혹은 저녁자리에 참석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게 또 정신력인지 요즘 들어 덜 취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 이거 뭐 결국에는 정신력인가? 주량은 늘고 줄고 하는 것이 아니라던데 거짓말인 것일까?


그 말은 절반 정도는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한다. 일단 긴장한 상태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내 신체 반응은 둘째치고 정신이 취하는 임계점이 늦게 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아무리 편한 선배들과 함께라도 ‘실수하면 안 된다’, ‘리액션 잘해야 한다’라는 압박감에 정신을 얼마나 또렷이 차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쪽으로 온갖 신경을 다 쏟다 보면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도 가끔 알 수가 없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술을 많이 마셔도 망가진 내 간은 혹은 내 간의 역량은 전혀 증가하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내 뇌는 망가지는 방식으로 적응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 몇 번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결국 그놈의 정신력으로 먹어내다 보면 내성이 생기는 것 마냥 내 뇌도 술에 점점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왜 우리네 부장님들이 마치 양수가 알코올이었던 태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건 그들의 뇌도 술에 더 이상 반응하길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우리만 할 때쯤 자그마한 정신력까지 긁어모았던 결과이겠지. 웃기게도 내성이 생겼다고 말하니 좋아진 것처럼 들리지만 결코 아님은 물론이요 그냥 술 마시는 나란 놈을 상대하길 포기했을 뿐이다. 결국 내 간과 뇌는 엄청나게 상해 가고 있는 것이다. 간이야 상해도 증상은 없고, 뇌는 술에 대응하기를 포기했다고 하니 그냥 나는 어떻게 내가 되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상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편한 친구들과 먹으면 난 금세 취하고 만다. 내 신체가 취하는 속도와 정신이 취하는 속도가 일치하고, 내 뇌를 학대하지 않고서도 즐길 수 있는 만큼 딱 마시고 마는 것이다. 내 정신력을 긁어모을 필요도 없다. 내 뇌가 애초에 내성이라는 걸 발달시킬 필요도 없다. 이제 보니 많이 먹고 덜 취하는 것보다 적게 먹고 금세 취하는 게 좋은 거였다. 내 모든 허물을 벗어던지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맛있는 술 한두 잔을 할 때, 술 한잔에도 마치 세상 취한 사람처럼 흥미로운 말들이 오고 갈 때. 그게 좋은 거였다. 이 세상 살기 팍팍한데 언제든 내 소진된 정신력 따위 없이도 날 만나주는 친구들에게 오늘도 마음속 깊은 감사를 전하며 마무리한다.


아,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고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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