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부처님 오신 날에 들렀던 석굴암에서 등나무를 보았다. 정자 인근에서 자리하며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막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걸 본 아빠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네, 갈등의 어원이 뭔지 아나?’
갈등(葛藤)이란 말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 모양새에서 나온 말이다. 칡도 등나무도 다 각자의 고유한 쓰임새가 있다. 약재로도 쓰이고 조경용 수목으로도 쓰이고. 그러니까 각각은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쉼터를 제공해 주며 지치고 아픈 사람들을 쉬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아주 독특한 특성이 있는데 바로 두 녀석이 만나면 반대방향으로 돌며 서로가 서로를 옭아맨다는 것이다. 서로를 옭아매는 것은 물론 그 가운데 있는 각종 수목들을 고사시켜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될 정도이다. 갈등. 있는 힘껏 붙어서 그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계속해서 다투고 옭아매는 그것.
가족은 내가 기억이 없던 시절부터 함께 한 존재이기에 나의 수많은 변태를 지켜보았다. 엄마는 태중에서부터 나의 존재를 느껴왔을 것이고, 부모님은 숨만 간신히 시던 나를 이 세상에서 생존시켰다. 가나다를 배우고, 처음이라며 친구를 데려 오기도 했을 것이다. 울면서 들어온 날도, 웃으면서 들어온 날도 있었겠다. 동생과는 또 얼마나 싸워댔는가. 오죽했으면 하루는 엄마가 둘 다 주먹 올리라고 말했다. 서로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놈이 그냥 서열 1위 차지하라며 우리를 세워놓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자라며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고, 외롭고 돈 없는 대학생은 또 부모님의 그늘막에 있게 되었다. 성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경계에서 5년을 보냈다. 나는 부모님을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틈만 나면 대구로 와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다. 한 달에 2번씩 오는 날도 매우 잦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인으로서 나의 이고(Ego)는 강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부모님 앞에서는 항상 유아기 때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자라난 내 생각을 말하는 게 꼭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아서. 어떻게 말해도 부모님 앞에서는 마냥 애기일 것 같아서.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피터팬의 나로서 존재해 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랐다. 그리고 이 과정이 마냥 매끄럽게 전달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투고, 서로 상처가 되는 말을 했다가도, 화해하고. 서로 끊임없이 실망시키고. 부모님을 만족시키고 싶은 K-장녀였지만 나는 알았다. 하루빨리 이 타이틀을 스스로가 벗어던져야 한다고. 세상이 무작위로 아무나 골라 K-장녀를 부여했을지언정 지금부터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많았다. 어릴 때 했어야 할 반항을 20대 후반에 하기도 했고. 빨리 나 스스로를 독립시키겠다는 집착에 여러 단계를 건너뛴 충격요법을 쓰기도 했다.
서로 얽혀있는 칡나무와 등나무는 참 가족 같다. 그런데 이런 칡나무와 등나무를 공생시킬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인위적으로 이 둘 사이에 약간의 틈을 줘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둘은 공생할 수 있다고 한다. 가족도 그런 것 같다. 너무 한 몸인 마냥 끌어안기보다는 서로의 개체를 인정하고 느슨함과 유연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쉽지 않겠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 정도로 다른 두 개체이지만, 한 편으로는 그래서 또 대단하게도 얽혀 버리니까. 그러나 갈등은 어느 관계에서나 필요하며, 때때로 서로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갈등은 나 스스로의 결핍을 마주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칡과 등나무 하나만을 끊어내고 분리해 낼 수 없듯이, 갈등은 결국 상대방뿐만의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결핍을 마주하게 된 그 순간, 우리도 더 상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