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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팍크 May 22. 2024

11호. 퇴사 후 1년을 되돌아보다 (4) 마지막화

결정을 내려야 했지만 내 의식은 무중력 상태에 놓인 듯이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의대 정원이 늘어난다는데 수시를 다시 어떻게 준비해봐야 하나? 6년 공부가 너무 길다면 어떻게 로스쿨 준비를 해서 변호사를 노려봐야 하나? 어릴 때부터 사람 심리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심리학 공부를 호주에서 다시 해볼까?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일까?


살면서 가야 할 길을 몰랐던 것이 처음이었다. 난 항상 눈앞에 당연히 떨어진 기회를 주우며 살았는데, 갑자기 내 앞의 모든 길을 거둬가시다니 신이시여. 너무 당황스러웠다. 뒤늦게 찾아온 방황과 사춘기는 힘들었다. 남들은 이 나이면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방황을 멈추고, 나의 아이덴티티를 곤고히 해나가던데. 나는 세상에나 어디서부터 잘못됐길래 이제야 그걸 고민하고 있나. 미래에 대해 큰 생각 없이 살았던 대가인가 무엇인가. 1달을 넘게 고민해 봤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보 전진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1보 후퇴. 어쨌든 간에 결정을 내리고 나니 지금 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였고 크게 두 가지로 추려졌다. 1) 지원할 곳을 찾아 지원하기, 2) 미친 듯이 시드니 즐기기


상반기 시즌이라 그런지 지원할 곳은 의외로 많았고, 이제는 부동산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고 느껴졌다. 창업에 관심이 많아진 지금, 창업을 할 깜냥은 없지만 그 과정을 지원하고 지켜볼 수 있는 VC에 지원했다. 그 외에 한 군 데 관심 가는 곳이 있기는 했다. 업무 자체는 내가 딱 원하던 것은 아니지만 팀이 너무 좋다는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늘 배울 수 있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팀이 있다는 것이 회사와 직무를 막론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업무적 호기심을 따라갈 때이며, 내가 몸담은 세계를 탐구하고 내게 맞는 옷을 찾아나갈 시기라고 생각했다.


미친 듯이 시드니를 즐기는 것은 참 행복했고, 너무 다행히도 나와 이걸 함께해 줄 친구들이 있었다. 근교로 운전해서 1-2시간 거리의 지역들을 다녀오곤 했고, 잊을 수 없는 기억도 많이 남겼다. 바닷가에 있는 해수 수영장에서 아침 6-7시경 왼쪽에는 뜨는 해를 오른쪽선 지는 달을 동시에 보며 수영하던 그 기억. 내 기억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테니스도 골프도 원 없이 치고, 아침에 숙소로 찾아오는 소들 지푸라기도 주었다. 시드니 시내도 참 많이 다녔다. 시드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Heritage들을 소개해놓은 책자가 있었는데 하나씩 가보며 도장 깨기 하기도 하고, 그냥 커피 마시러 시티나 서리힐즈까지 나가기도 했다. 마지막 날엔 더블베이에 가서 추억의 워터프런트 카페를 갔다가, 친구의 이사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같이 오이스터와 치맥을 마시고 그렇게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가장 평범하지만 내가 가장 추억하는 사람과 장면을 잘 새겨오고 싶었다.


그렇게 1년을 마무리했다. 끝나는 날까지도 끝날 것 같지 않던 시드니 생활이었다.


결말이 허무하려나 싶지만 난 그렇게 찾은 보석들을 마음에 담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과 장소와 기억들을 잘 품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면 다시 출근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퇴사썰을 들을 때 듣고 싶어 하는 그런 통쾌한 썰은 아님에 분명하다. 누군가는 퇴사 후 시드니를 왔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180도 변화된 삶을 산다던데 나는 돌고 돌아 360도를 돌아버렸다.


물론 좋은 기억만으로도 충분한 1년이었지만, 이 1년이 내 안에서 화학반응을 이끌어내길 바란다. 내 안에 잘 머무르다가 어떤 계기로  연쇄반응이 일어나 폭탄처럼 또 어느 순간 팡- 하고 터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1년을 마무리해 보겠다.


안녕, 시드니! 매번 나의 힘든 때 도피처가 되어줘서 고마워. 이젠 진짜 한 발 짝 더 나아가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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