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할인마트를 운영하는 최 사장은 A시에 새로운 지점을 열 계획입니다. A시는 ‘한국의 비버리힐즈’로 떠오르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 마트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게 중요한데요.
그런데 지역 시민단체가 개점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A시에 지점을 열려면, 도로를 넓히기 위한 공사 비용으로 3억 원을 내라고 하죠. 그 이유는 대형 할인마트가 생기면, 교통량이 500%나 증가해 A시는 교통 지옥이 된다는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최 사장은 5천 만원 이상은 줄 수가 없습니다. 회사 측 조사에 의하면 교통량은 7%정도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A시의 시민단체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며, ‘적어도 2억 8천 만원은 내라’고 합니다. 최 사장은 ‘백 번 양보해서 1억 원 주겠다. 그 이상은 절대 안된다’라며 못박았는데요. 이 협상,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바로 ‘흥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흥정은 숫자로만 이야기하는 협상인데요.
집값을 협상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6억 원은 주셔야죠”라고 하는 집주인에게, 구매자는 “너무 비싼데요, 4억 원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서로 양보하라며 승강이를 벌인 끝에, “그럼 반반씩 양보해서 5억 5천만 원으로 합시다” 라며 협상을 끝냅니다. 바로 이것이 흥정인데요.
서로 원하는 가격을 부른 후 조금씩 양보해 나가기 때문에, 협상보다는 숫자 게임에 가깝죠. 따라서, 흥정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의 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정을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에 대해 만족하기 어려운데요.
그럼 흥정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협상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원칙이 있는 협상’을 해야 합니다. 원칙이 있는 협상을 위해선, 서로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에 먼저 합의를 하는 것이 필요한데요. 이런 객관적 기준을 협상에서는 ‘스탠다드’라고 합니다. 흔히 사용할 수 있는 스탠다드로는 시세나 전례, 관례, 제 3자의 판단 등이 있는데요.
앞에서 본 집값 협상 상황으로 예를 들어볼까요? 서로 ‘6억’, ‘5억’이 적당한 가격이라며 주장하기 전에, ‘우선 이 동네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야기해 보는 게 어떨까요?’ 라고 제안을 하는 건데요. 시세를 알아본 집주인이 “우리 동네 시세가 평당 5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라고 하면, 구매자는 “그럼 대지 100평, 건평 60평이니 5억 원 정도가 시가라고 볼 수 있겠네요. 보통 건물 값을 안치니까요.” 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객관적 기준에 합의를 하면 협상에 하나의 원칙과 논리가 생겨, 숫자로만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논리적인 협상이 됩니다. 논리적인 협상은 서로 공정하다고 인정한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기 때문에 결과를 납득하기도 쉬운데요. 따라서, 협상의 뒷맛도 훨씬 좋아지게 되죠.
심해 자원 채굴 전에 사용료를 얼마나 내야 하는지를 두고 인도 정부와 미국의 기업 사이에 갈등이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 근해에서 심해 자원 채굴을 하려는 미국의 기업에게, 인도가 채굴 전 사용료로 6천만 달러를 요구한 거죠. 인도 영해에 있는 자원을 채굴하니 돈을 내라는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미국은 사용료를 한 푼도 낼 수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아직 채굴의 수익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미리 사용료를 내는 건 불합리하다는 거였죠.
양측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은 채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미국 기업이 묘안을 냈습니다. 바로 MIT에서 개발한 심해 채굴의 경제적 실용성을 평가모델을 적용하자고 제안한 거죠. 그 모델은 초기 기본 비용이 심해 채굴의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주는 것이었는데요. 인도는 공신력 있는 MIT에서 개발한 모델이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를 얻을 것으로 생각해 이 제안에 찬성했습니다.
MIT 모델로 미국 기업이 채굴하려는 공구의 수익성을 산출한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인도가 제안한 사용료는 미국 기업의 채굴을 어렵게 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죠. 이 결과를 들은 인도는 사용료를 얼마로 할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고요. 사용료를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버티던 미국 기업 역시, 분석 결과를 보고 어느 정도의 기본 사용료를 내도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MIT 모델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고, 양측은 한 발씩 양보를 할 수 있었으며 사용료에 대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던 거죠.
이 협상이 풀린 비결, 아시겠나요? ‘사용료를 내라’, ‘사용료를 낼 수 없다’ 며 꽉 막혔던 협상이 MIT 모델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쉽게 풀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탠다드의 힘입니다.
만일 나에게 불리한 스탠다드에 합의했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탠다드는 양측이 주장하는 내용에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첫 출발점입니다. 스탠다드에 합의하고 나면, 프리미엄과 디스카운트를 통해 얼마든지 최종 가격을 바꿀 수 있죠.
앞의 사례에서는 MIT 모델에서 나온 결과를 출발점으로 하여, 인도 정부는 이 공구에서 채굴하는 것이 왜 좋은지, 미국 기업에 어떤 이점을 주는지 등을 근거로 프리미엄을 주장했고요. 반대로 미국 기업은 이 공구에서 채굴을 할 때의 리스크를 말하며 디스카운트를 요구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양측은 최종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죠.
앞의 최 사장의 사례로 돌아가볼까요? 이 사례는 실제로 미국 세큄시에서 미국 최대의 할인점인 월마트의 개점을 두고 있었던 협상입니다. 도로를 넓히는 공사비용을 월마트가 얼마나 낼 것인지에 대해 양측이 팽팽히 맞선 이 상황에서, 세큄시의 시장이 기가 막힌 스탠다드를 제안했습니다. 바로 ‘독립적인 교통영향평가기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는데요. 일단 세큄시에 월마트를 개점하고, 교통영향평가기구가 교통량이 얼마나 증가하는 지를 한달 간 분석해, 공사비용을 결정하기로 한 거죠.
이렇게 스탠다드를 합의하니, 양측은 ‘교통량이 얼마나 증가하느냐’에 관해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를 논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신, 객관적 기구의 분석에 따르기로 합의함으로써 좀더 쉽게 협상을 풀어갈 수 있었죠. 그리고 지역 시민단체와 월마트는 스탠다드에 합의를 한 후에,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교통량 증가 비율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얼마의 공사 비용을 낼 것인지 서로 프리미엄과 디스카운트를 주장했고, 결국 양측의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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