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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2. 2018

아일랜드 4일간의 만남 2편

아일랜드 연가 6

제목 : 아일랜드 연가 6 : 아일랜드 4일간의 만남 – 2편 -


미국에서 오셨으니 비행기에 족히 7-8시간은 앉아 계셨을테고 서부에서 출발한 몇몇은 비행시간과 환승시간까지 고려하면 15시간 가까이 여행을 하셨을 테다. 하지만 누구도 피곤하다거나 아프다거나 또는 쉬어가자고 하는 분은 안계셨다.

첫 일정은 점심식사. 일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매끼니 식사 메뉴를 하나하나 여행사 실장님이 모두 챙기고 식당정보와 심지어 양념이나 소스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아일랜드 다른 지방에는 한식당이 없으므로 첫 식사는 한식으로 하기로 했다. 딱 한분만 매운걸 전혀 못하시니 간장 비빔밥을 별도로 주문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을뿐 다른 요청은 없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어떤분은 당뇨가 있어서 흰쌀밥은 피해야했고, 어떤분은 채식주의자고 어떤분은 통풍으로 해물이나 육류를 못드시고 오로지 익은야채와 닭고기를 드셔야 했다. 하지만 십여년 가까이 한 여행사를 이용하는데도 여행사 실장은 이 사실을 아일랜드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고한다. 어르신들은 자신의 식성이나 건강상태로 인해서 수고를 더하는 것이 부담되서 말씀을 안하셨던것일까.


일년이면 나는 고작해야 두 세팀의 단체 여행객을 받고 있다. 여행일을 같이 하고 있는 다른 여행사에선 왜 단체를 잘 안받냐고 불평하기도 하고 돈 되는 일을 잘 모른다며 나를 타박하기도 한다. 개인여행객을 선호하는데는 나름대로 일에대한 나의 철학과 애착때문이다. 여행은 그들의 여행임과 동시에 나의 여행이기도 하다. 놀고 먹고 구경다니는 일을 직업으로 둔 나의 인생이 난 참 대견하고 감사하다. 내가 행복하면 대체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여행자들도 행복하다. 그런 행복을 만드는 일을 두고 돈을 셈하기 시작하면 나의 역할이 행복한 추억을 만드는 가이드가 아니라 같은말 반복하는 기계 같은 존재로 전락하지 않겠는가.


단체여행객의 경우 연령을 불문하고 매팀마다 식사시간에 불평이 나온다. 맵다, 짜다, 달다, 묽다, 되다, 퍽퍽하다, 싱겁다등의 맛 뿐만 아니라 식사가 많니, 적니, 이뿌니, 밉니 또는 점원이 상냥하네 마네부터 왜 안웃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음식이 다 나오고나서 맘에 안든다고 바꾸는 사람도 있고 메뉴를 다른걸로 해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사람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한두명의 불평과 짜증으로 다른 사람들마저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상이다.


이렇게 단체로 오면 모두를 만족시킬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개인의 취향대로 하고 싶다면 단체 관광을 말아야 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다가도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는 ‘분명 그도 힘들게 말하는 걸거야, 이번 여행이 only 여행일 수도 있으니 그에게 추억이 되게 해주자!’ 다짐 하기를 여러 차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아름다운 시간을 위하여….라며 나에게 주문을 걸기도한다.

당연히 이번 여행에서도 그럴거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그들은 그 누구도, 단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되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한분한분께 뭐 필요한지, 부족한게 없는지 여쭙는대도 ‘됏다! 됐다!’ 하시며 얼른 앉아 밥먹으라고 나를 재촉하신다.


식당밖으로 나오니 더블린 바닷바람이 시잉~ 구름을 불어온다. 올때 꼭 도톰한 잠바랑 스웨터, 스카프, 모자, 작은우산과 썬글라스를 준비하시라고 당부했지만 미국에서도 제일 날씨 좋다는 샌디에고에서 오신 부부께서는 얇포롬한 셔츠 몇장만 가져오셨다. 오랫만에, 참 갓만에 쌀쌀한 느낌이 들어 좋다며 헤헤 웃으시는 할머님 옷깃을 올려주는 할아버지 눈빛은 그저 부부의 정이라고 가벼이 말하기엔 내가 모르는 깊은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여행장소는 더블린 시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서 필사본이 있다는 트리니티 대학교의 고서박물관도 갔고, 아일랜드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성페트릭 성당도 갔고, 영화에 자주 나오는 버스킹 거리 그라프톤 스트리트를 걷기도 했지만, 이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곳은 초라하고 앙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리쉬 이민자 동상’ 이었다. 1800년대 중반에 일어 났던 감자기근으로 인해 수 백만명이 이민을 가거나 가난으로, 병으로 사망하는 유럽 최대의 기아사건으로 기록된 아일랜드의 감자기근은 처참하기로 유명하다.


더블린 시내를 가르는 ‘리피강’변 끝자락에 세워진 ‘아이리쉬 이민자 동상’은 고향을 등지고 하염없이 고단한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걷는 한 무리의 눈물과도 같다. 한동안 말없이 바다쪽과 강쪽을 번갈아 보던 한 할아버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님이 7남매를 끌고 평안도에서 서울까지 1.4후퇴때 건너 왔다며, 자신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억에 없지만 이 동상이 그때 내 어머니 모습이지 않겠냐고 흐린 입술을 꾹 깨무셨다.  


우울해진 분위기를 한껏 치켜올려 보려고 그들을 이끌고 시끌벅적한 ‘템플바 거리’로 향했다. 그곳은 우리나라의 홍대앞이나 대학로 같은 젊음의 거리이고 문화의 거리다. 밤이면 노래하는 버스커들이 즐비하고 늘어선 선술집마다 여행자와 현지인들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곳. 뿐인가! 우리가 알만한 문학가들,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사무엘 베케트, 버나드 쇼까지 세계적인 문호들이 드나들며 문학을, 예술을 논하던 곳이다. 울긋불긋 한창 만개한 페추니아가 거리를 가득 매우고 흥겹게 펍송을 부르는 듯하다.  





너댓곳의 더블린 명소를 돌아보는 몇시간동안 우리는 소나기를 여러 차례 맞았다. 비가 왔다가 금새 개이고 다시 밝은 햇살을 뚫고 쏟아지는 빗방울에 껄껄 ‘거, 참 신기할세!’ 하신 할아버님과 꼼꼼히 조각포처럼 접은 비옷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시는 할머님은 변덕스러운 날씨를 불평하기는 커녕 그저 신나기만 했다. 다섯시즘 되서인가… 드디어 낮게 드리운 구름 맞은편으로 커다란 반원의 무지개가 올라왔다. 그리고 십여분 지나서 또하나의 무지개가 무지개를 씌우듯 더 크게 원을 그렸다. 질척이는 거리에서 카메라로, 핸드폰으로 무지개를 찍어 내고 나는 그 무지개 끝에 숨어사는 ‘레프리칸’ 요정을 우리도 여행중에 만나게 될지 모른다며 수다쟁이 아이리쉬처럼 그들의 전설을 이야기 주었다.


거리를 걸으며 투어를 하다보면 주변이 산만하고 각자 사진찍으며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이것저것 설명을 해도 집중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먼 아일랜드까지 역사공부를 하러 온온 것 아니고 강의를 들으러 온 것 도 아니니 대체로 여행객들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나 또한 내 이야기 듣기를 강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더욱 선호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어르신들은 얼마나 집중을 잘 하시는지 내가 입을 떼기만 하면 삼삼오오 흩어져 사진을 찍다가도 우르르 모여 귀를 내 얼굴방향에 두고 이야기를 경청하셨다. 여담을 하기도하고 작은 에피소드를 말하는 것 조차 너무 열심히 들으시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날 저녁식사는 아일랜드 전통펍에서 해물특식으로 하였다. 1800년대말에 처음 문을 연 펍 내부에는 그때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연해 둔 인테리어와 사진으로 많은 유명인사들이 찾는 곳이다. 공간의 역할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음식이 마련되는 사이 자연스럽게 나는 아일랜드 역사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우린 아일랜드 역사를 따라 한국의 과거로 함께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6.25를 겪어낸 어른도 계시고, 1.4후퇴를 경험한 분들도 계셨으므로 그들의 경험담은 아일랜드 역사와 오버랩되면서 아이리쉬의 고단함에 어느새 우리도 동화되어 공감하였고,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몇몇 다른분들은 마치 교장선생님 훈시를 듣는 초등생처럼 허리를 곧이 펴고 ‘예, 네, 아~ 허, 네~’를 연발하며 경청하였다. 아니 그것은 공감하는 감탄사라기보다 위로의, 감사의 리액션같았다.

신기한 것은 훨씬 말을 많이 했던 선배 어른들의 접시는 다 비워졌고, ‘네, 예….’하며 감탄사와 경청의 리액션을 하던 후배 어른들의 음식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현생을 보며 내가

“70이 가까운 어른들이 선배 어르신들 말씀 듣느라 어려워서 식사도 못하시는 것 같아요’ 하니,

고참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아니지, 그건 습관이 만든 기술 탓이지. 얘들은 고생을 안해봐서 그러는 거고, 우리같이 6,25, 1.4후퇴 겪은 세대는 먹을게 없던 시절에 살아서 먹을것만 눈앞에 있으면 누가 먹어 없애기 전에 얼른 먹어치우는게 습관이 되었거든. 그 습관이 오래되니까 기술이 된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미국에 이민와서도 미국놈들한테 밥그릇 안빼기고 먹고살았지”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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