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따앙 마녹

괴식열전 29

by 이그나티우스
기나따앙 마녹 - 복사본.jpeg




기나따앙 마녹 풍부한 코코넛 밀크에 닭고기를 넣고 푹 익힌 필리핀의 스튜 요리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도 세계 각국의 요리가 소개되면서 동남아 음식도 제법 익숙하게 되었다. 베트남 쌀국수나, 태국의 똠양꿍은 이제 대도시나 공업단지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남아의 모든 지역의 음식이 다 잘 알려진 것은 아니다. 필리핀이나 미얀마 음식의 경우에는 교류의 규모에 비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외국 음식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필리핀의 래촌이나 아도보를 아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남아의 음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롭다. 애초에 여러 민족이 잡거하는 트랜스내셔널 지역일수록 풍요로운 식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인종의 순수성이 문화의 우월성을 낳는다는 나치즘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 인류의 많은 문화유산은 여러 인종이 잡거하는 트랜스내셔널 크레올 지역에서 발달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동남아시아는 토착 원주민과 해양으로부터 이주한 중국 화교, 대항해시대 이후에 들어와 수백년간 식민지를 건설했던 서양세력의 문화가 섞이면서 아주 다양한 음식문화를 낳았다. 필리핀도 다르지 않은데, 필리핀은 현지인의 토착문화와 스페인 식민지가 건설되기 이전부터 이주해온 중국인 화교들의 문화, 그리고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문화가 섞이면서 굉장히 흥미로운 화학반응을 일으킨 곳이다.


이러한 필리핀의 식문화는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체인 ‘졸리비’를 낳았고, 졸리비는 미국으로 역수출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컴포즈커피’를 인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리핀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알기로 부산역 차이나타운에 필리핀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곳에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아쉽게 생각하던 차에 최근에 구입한 코코넛 밀크와 닭고기를 필리핀 요리인 기나따앙 마녹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코코넛 밀크에 대해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음식을 덜 가리는 편인 나에게도 코코넛 밀크는 썩 좋아하는 재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코코넛 밀크를 이용하여 야매로 태국식 옐로커리를 만들어 집에서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특유의 코코넛 맛에 물려서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도나 동남아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코코넛밀크가 있고 없고에 따라 만들 수 있는 음식 종류의 가짓수가 너무 달라지는데다,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니어서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해서 사용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필리핀 음식인 기나따앙 마녹이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닭고기와 코코넛밀크만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어 보였고, 그래서 이것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기나따앙 마녹의 조리방법은 간단하다. 닭고기를 마늘과 피쉬소스(나는 대신에 까나리액젓을 사용)하여 볶은 뒤 코코넛 밀크를 두차례로 나누어 넣고 오랫동안 끓이면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기호에 따라 색감을 주는 야채를 추가할 수 있다. 나는 집의 남은 파를 추가했다. 유튜브를 보니 쪽파를 추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코넛에 대한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한 입 떠먹어보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코코넛 밀크를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뒷맛이 느끼해서 그렇다. 처음의 풍부하고 부드러운 맛은 정말 좋은데, 그게 뒤로 계속 쭉 이어지면서 물리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나따앙 마녹에서는 액젓이 느끼한 뒷맛을 짭짤하고 깔끔하게, 그리고 감칠맛 있게 잡아주면서 완벽한 마무리를 해 주었다. 사실 나는 액젓을 넣는 것을 깜빡해서 한참 끓이던 도중에 넣었는데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액젓 덕분에 첫맛에선 부드러운 코코넛의 풍미를 즐기고, 뒷맛에선 깔끔한 액젓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부드럽게 익은 닭고기는 툭툭 잘라서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액젓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급격히 물리는 현상 자체는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건더기와 국물 반쯤은 다 먹었는데, 밑바닥에 깔린 국물을 먹는데는 실패했다. 역시 코코넛 베이스의 동남아 음식은 아직까지는 내게는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나는 필리핀 음식을 먹으면서 기후와 요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기후는 생각보다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내가 세계 각국의 요리를 재미로 만들어보면서 느끼는 것은 날씨에 따라 요리법에도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아주 덥거나, 아주 추운 지역은 상대적으로 요리를 간단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서아프리카나 동남아, 그리고 남인도지역의 요리는 하여간에 재료를 다 갈아버려서 시간을 단축하는 경향이 있다. 칼질과 불솜씨에 목숨을 거는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요리와 비교하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리의 완성도가 결코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리는 복잡하다고 무조건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론 최고로 간단한 요리법이 최고로 완성도 높은 요리를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이런 지역의 요리사들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운 데서 그렇게 복잡한 음식을 만들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생각보다 주방은 덥다. 불을 계속 사용하는데다, 냉방시설과도 일반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거실의 에어컨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아일랜드 키친이 있는 고급 신축아파트 정도가 아니라면 보통의 아파트나 업장의 주방은 굉장히 덥다. 이것은 아마 더운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더운데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썰고, 무치고, 버무리는 복잡한 조리과정을 많이 거칠 수 없다. 이런 곳에서 프랑스처럼 요리를 했다가는 요리사나 주부가 탈수증상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아마 뭐든 재료를 갈아버리고, 간단한 방식으로 요리를 완성하는 것은 이런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내 추측이지 인류학적이거나 문화사적인 연구결과는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요리법의 복잡성 여부를 떠나 식문화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식문화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외식의 일반화와 야시장의 발달이다.


외식의 일반화는 싱가포르나 베트남 등에서 진전된 여성 노동력의 사회진출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집안에서는 너무 더워서 매끼 특히 점심을 해먹기가 어려워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특히 싱가포르는 아예 국가적으로 호커센터라는 주거단지의 푸드코트를 집중적으로 관리해서 주민들이 외식으로 삼시세끼를 때울 수 있도록 보장하는데, 아마 기후적인 영향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야시장 역시도 생각해보면 동남아같이 더운 곳에서는 밤시간이 아니면 음식을 먹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낮에는 간단하게 때우고 제대로 음식을 먹고 즐기는건 밤에 하는게 아닐까?


내가 인류학자가 아니다보니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내가 더운 날씨에 요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부터는 점심보다는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점심과 저녁은 간단하게 때우기로 했다. 점심시간에는 성대하게 밥을 해먹기에는 너무 덥고, 요리를 한 다음에 환기를 시키기에도 너무 부담스럽다. 그나마 날씨가 선선한 아침시간에 빨리 밥을 해먹고 덜 더울 때에 환기를 시킨다면 나을 것 같다.


이제 우리나라도 6월과 9월이 여름으로 사실상 편입된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는 나의 식사시간을 바꾼 것처럼 우리의 식문화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26화필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