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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Jun 18. 2018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김한빈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정치가 굴원(屈原, B.C. 339년 ~ B.C. 278년)이 반대파의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난 뒤 강가에서 어부(漁父)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밝힌다. 도를 지닌 채 은둔해 살고 있는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의 변화에 따라 더불어 살 것을 권한다. 이에 굴원은 자신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는 신념을 밝히고, 결국 장사(長沙)의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는다. 다음은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이다.


 굴원이 쫓겨난 뒤 강가에서 서성이고 늪가에서 거닐며 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몸은 말라있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오. 어쩌다가 여기에 이르렀소?”라고 하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이 때문에 추방을 당하였소.”라고 하였다.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상대에게 얽매이지 않고 세속과 더불어 옮겨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흐리면 어찌하여 그 진흙탕을 휘저어 그 물결을 날리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다 취했으면 어찌하여 그 술지게미를 먹고 그 막걸리를 마시지 않으시오. 무슨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높이 행동하여 자신을 쫓겨나게 하였소?”


 굴원이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고 하였소. 어떻게 자신의 깨끗함으로 상대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수(湘水)의 물결에 뛰어들어 강의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질지언정 어떻게 희고 흰 결백함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저어 떠나면서 노래하기를,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빨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을 수 있다네.”라고 하고는 마침내 떠나서 더 이상 함께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오래된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 고대 굴원의 ‘어부사’는 삶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시사하고 있다. 세상과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의 방식과 개인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고통을 감수하는 삶의 방식이 극단적으로 대립된다. 전자는 중국 민중들에게 체화된 노자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깊고, 후자는 소수의 사회 지도계층이 견지해온, 정의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맹자의 유가 사상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양극단에 치우친 삶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의 사회환경 조화주의는 세상에 대한 환멸에 부딪히는 순간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고, 후자의 개인적 고결주의는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가 일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은 개인적 이익이 절대 가치로 승격한 현대 사회에서 부조리한 사회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자칫 시류에 영합하는 포퓰리즘과 보신을 위한 기회주의로 전락할 유혹을 배제하기 어렵고,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비판적 사고가 함몰될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뒤는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개인이 선택한 정치적 신념이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한갓 독선과 독단의 도그마(교조)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앞은 사회환경이 언제나 개인의 복지를 위해 운영되지 않는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안고 있고, 뒤는 개인의 신념이 국민 다수가 동의하는 일반의지와 거리가 먼, 절대적 선이 아닐 수 있다.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면 집단이나 조직에서 배척당하는 왕따를 당할 수 있고, 개인의 고결함을 견지하지 못하면 자존감을 상실하고 개인의 존엄성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양극단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난 중도(中道)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의 대립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붉은 먼지가 자욱한 세상과 더불어 살되,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자세를 버리고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 일반의지를 실천하는 일이다.



오륙도 신문 칼럼 (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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