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거의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아내는 맥주를 좀 끊어보라고 성화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 마트에만 가면 맥주 진열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독일 라거보다 체코 라거를 즐겨 마시는데(주로 필스너 우르켈과 부데요비츠키 부드바르), 최근에 다시 독일 맥주가 맛있어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가펠 쾰쉬라는 녀석 때문이었다. 이 맥주는 라거처럼 마시기 쉽고 청량감이 들지만 에일의 하나이다. 게다가 라거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과일 향이 살짝 배어있어 여름철에 제격이다. 라거와 에일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하이브리드 맥주인 셈인데, 그래서인지 이 스타일의 본고장인 쾰른에서는 이 맥주를 라거나 에일 중 하나로 구분하지 않고 쾰쉬 스타일, 그 자체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생소하고 독일의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르는 쾰른의 맥주를 한국에서 이렇게 손쉽게 구해서 마실 수 있다니, 하고 가벼운 감상에 젖어 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세계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 정확히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어림잡아도 20년은 넘은 것 같다. 오래전, 세계 맥주라고 하면 귀하고 비싸서 한 번 마시기가 쉽지 않았다. 시중에 유통되는 맥주의 종류도 많지 않았지만,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이 컸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유독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맥주 하나가 있다. 일명 삿포로 실버컵이라 불린 캔맥주이다. 그냥 삿포로 맥주가 아니고 실버컵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캔맥주의 줄을 세워도 삿포로 실버컵의 우아함은 따라갈 수가 없다. 전체적인 색상이 은색이라 실버컵이라 불렸는데, 캔의 허리 부분이 살짝 곡선으로 들어가 있다. 색상과 모양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손으로 잡았을 때 꽉 쥐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가격은 꽤 비싸서 그 당시 물가로 만 원 조금 안 되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편의점에서 세계 맥주를 파는 시절도 아니었고, 일반 맥줏집에서도 구할 수 없어서 조금 고급스런 맥줏집에서 마셨던 기억이 난다. 이 맥주는 마시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하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맥주에 만 원씩이나 거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만 원이면 수입 맥주 4캔을, 편의점이든 마트든 심지어 동네 슈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괜한 감상에 젖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맥주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글 하나를 읽었다. 맥주 역사서인 <그때, 맥주가 있었다>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835년 독일에서는 최초로 철도가 개통되었고, 첫 기차는 뉘른베르크에서 퓌르트까지 연결되는 10km 정도의 철도를 시속 40km로 달렸다고 한다. 철도 프로젝트는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다. 당초 예산보다 15% 이상의 비용을 추가로 쓰면서 건설되는 철도에 대해 대중들은 미심쩍거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철로 제작에 필요한 부품을 운송하는 데 마땅한 운송 수단이 없어, 오히려 철도 운송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튼 이 독일 최초의 열차는 승객을 싣고 뉘른베르크에서 퓌르트까지 약 9분을 달렸다. 그리고 이 열차에 최초로 실은 화물이 있었는데, 바로 맥주 두 통이었다(그리고 신문 한 꾸러미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지역의 양조장에서 생산된 로컬 맥주를 선호하던 독일인들이 이웃 동네의 신선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200년이 흘러 운송의 수단과 유통의 기술은 더욱 발전하였다. 나는 독일의 지방 도시 쾰른까지 가지 않았지만, 지금 쾰쉬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글은 대단한 글이 아니다. 맥주의 나라를 여행하고 쓴 글도 아니고, 맥주를 수십 년간 양조한 경험으로 쓴 글도 아니다. 한국의 여느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맥주를 방구석에서 마시면서 쓴 글이다. 나는 내 방구석에서 맥주로 작은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