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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Dec 01. 2018

오키나와 재건의 희망, 오리온 맥주의 역사

일본 맥주의 역사 (6) - 오리온 맥주의 역사



오리온 맥주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일본에서 1%도 안 되는 시장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이 맥주는 오키나와서에서는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오리온 맥주는 전후 오키나와의 사회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의지로 설립되어 현재는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기업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리온 맥주를 이야기할 때 오키나와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키나와는 중국의 문화 영향권이 있는 '류큐'라는 작은 왕국으로 중개 무역을 통해 번성했던 나라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 강제로 귀속되었다가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는 아픔을 가지게 된다. 미국이 이기면서 전쟁은 끝이 나지만 오키나와 주민 12만 명이 죽고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통치를 받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키나와 맥주는 오키나와 전후 재건의 역사와 함께 했다. 오키나와 맥주가 창업했던 1957년 당시는 아직도 미국의 시정하에 있던 시기였다. 오키나와에서 어느 날 미군의 민정 장관이었던 벤셔(일본어를 번역한 것이어서 정확한 영어 이름을 찾지 못했음) 준장이 상공회의소 총회에서 '앞으로 오키나와 산업의 기둥은 시멘트와 맥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멘트는 건물이나 도로 등을 건설하는 하드웨어 측면에서, 반면 맥주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주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강연을 오리온 맥주를 창업한 '구시켄' 씨가 듣게 된다. 구시 켄씨는 오키나와에서 된장이나 간장을 제조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오키나와의 전후 복구를 위한 새로운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이 강연을 감명있게 듣고 오리온 맥주를 세우게 된다. 간장과 된장도 발효를 이용한 식품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쉽게 맥주 산업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구시켄씨는 28명의 발기인을 모집하고 맥주 회사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기린 맥주와 제휴하여 '오키나와 기린 맥주 주식회사'를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기술 제휴 협상과정에서 무산되면서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가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로부터 50년이 지난 2017년 오리온 맥주는 기린 맥주가 아닌 아시히 맥주와 업무 협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다음의 문제는 맥주 공장이었다. 맥주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부지와 여러 가지 설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물을 많이 사용한다. 오키나와는 산호초가 융기한 섬이기 때문에 알칼리성 물이 주류이다. 그런데 맥주를 만들기에 경수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창업 전에 구시 켄씨는 오키나와 각지를 조사하여 산이 있고 연수를 채취할 수 있는 나고에 맥주 공장을 건설한다. 그렇게 오키나와 맥주 회사는 생겨나고 1959년에 첫 맥주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첫 맥주는 맥아와 홉의 맛을 강조한 독일식 맥주로 소비자들이 많이 찾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버드와이저나 아사히, 삿포로와 같은 가벼운 맥주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온 맥주는 1960년 효모를 제거하지 않은 생맥주를 생산하여 나고 근처에 판매하고 인해전술로 영업을 펼친다. 인해전술이란 전 직원을 동원해 오키나와의 식당에서 오리온 맥주를 주문하고 다닌 것이다. 이 영업 전략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결국 한 때 오리온 맥주는 오키나와에서 90%의 점유율을 가졌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오키나와의 역사

이제부터 지루한 역사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키나와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키나와의 역사는 류큐 왕국이 번성하였던 시기, 일본이 지배하였던 시기, 미군정이 통치하였던 시기, 다시 일본에 반환되어 현재까지의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현재의 시기를 제외한 세 번의 시기를 간략히 정리해 본다.


류큐 왕국 시기 (12세기 ~ 16세기)

12세기경 오키나와의 각 지역에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15세기 초 이 호족들을 모아 나라를 세운 것이 류큐 왕국이다. 15~16세기 류큐 왕국은 중국과는 조공무역,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의 나라들과는 중개 무역을 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과 문화적으로 활발히 교류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무역으로 발전한 류큐 왕국이었지만 1609년에 일본 사츠마 번의 시마즈가 침입함으로써 끝이 나고 만다.


일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시기 (1609 ~ 1945)

류큐왕국은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을 위한 물자를 조달해 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때 도와주지 않은 보복으로 사츠마 번의 시마즈에게 류큐 왕국을 침입하여 속령으로 삼는다. 사츠마 번은 지금의 남큐슈의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 현이 있는 지역의 지방조직이다. 속령으로 삼은 후 겉으로는 독립국가로 인정해 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였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의 함대가 개국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류큐를 일본의 지방 행정 조직으로 편입하게 한다. 이 시기 류큐는 미국과 유럽의 함선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1872년 류큐를 류큐번으로 삼았다가 1879년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 오키나와를 지배하던 일본은 태평양 전쟁 때 이곳에서 미국과 지상전을 치른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태평양 섬을 하나씩 점령에 가면서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오키나와는 미국에게는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고, 일본에게는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1945년 3월 미군 함대는 오키나와의 중부 자탄 지역에 상륙하여 지상군을 투입한다. 곧이어 지상군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오키나와 섬의 북부로 반은 오키나와의 남부로 전진한다. 이 지상전에 밀린 일본군은 일본 특유의 집단 자결로 전쟁을 마무리한다. 전쟁의 피해는 상당했다. 일본군 6만 5천 명이 죽은 것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출신 군인 3만 명, 민간인 9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강제 연행된 종군 위안부 만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더 컸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여담이지만, 영화 '핵소 고지'가 오키나와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전후 미군정 통치의 시기 (1945 ~ 1972)

전후 오키나와는 미군정의 통치를 받는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중국과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한 거점으로 생각했다. 미국은 일본을 공산주의의 방패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군사적 요새를 만들려 했었는데, 일본 본토는 일본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므로 오키나와에 자유롭게 군사적 요새를 만들었다. 1965년 2월 미국은 베트남 내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최전선기지로 사용된 것이 오키나와이다. 미국은 한국전쟁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무차별 폭격을 했으며, 정글 지대에 고엽제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화학전까지 치렀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이때 오키나와 민중들은 '오키나와 조국 복귀협의회'를 만들어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는 대중 운동을 펼쳤다. 오랜 전쟁 끝에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는 데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자 오키나와의 지배도 어렵게 되었다. 결국 일본의 사토 수상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만나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기로 약속한다.



오리온 맥주의 역사

오리온 맥주의 역사는 앞서 간략히 설명한 역사와 같다. 앞서 못 다룬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이어나가 보려고 한다.


1957년, 오키나와가 미군정 하에 있던 시기, 오키나와의 자립을 위한 지역 경제의 번영을 목표로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58년 1월, 맥주 이름을 공모하여 '오리온 맥주'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대중에게 친근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공모하여 약 2,500건의 접수를 받았다. 상금이 1등 1만 엔(83.4달러), 2등 3천엔(25달러), 3등 2천엔(16.7달러)라고 하는 데 당시 상당히 고액이었다고 한다. 오리온이란 이름은 별자리 오리온에서 온 것인데, 남쪽의 별을 의미하고 오키나와가 남쪽에서 있어 이미지가 일치하여 선정되었다. 또한 별이 사람들의 꿈과 동경을 상징한다는 점, 당시 오키나와를 통치하는 미군의 최고 사령관이 쓰리 스타였다는 점도 선정의 이유였다고 한다.


1958년 11월, 나고시에 오리온 맥주 공장을 준공한다. 이 곳은 오키나와에 유일하게 있는 오리온 맥주 공장이다.


1959년, 오리온 맥주를 출시한다. 나고 공장에서 나하시로 첫 발송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섬 전체에 일제히 발매한다. 그리고 이 해 사명을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에서 '오리온 맥주 주식회사'로 변경한다.


1960년, 드래프트 병맥주를 출시한다. 열처리를 하지 않은 생맥주를 발매하여 나고를 중심으로 판매한다. 나고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오키나와 전 지역에 판매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병에 라벨이 없고, 병목에 상표 스티커를 고무줄에 붙여 사용했다고 한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다. 일본 본토에 복귀하고 오키나와에서만 주세가 감면되는 초치가 취해졌다. 우대 세율은 5년간의 한시적인 조치였지만, 5년마다 재검토하여 연장할 수 있었다. 현재도 오키나와 내의 출하용 맥주에 한하여 본토 주세에 비해 20% 경감되어 있다.  


1973년, 드래프트 캔맥주를 발매한다. 350ml의 캔 생맥주는 신선한 생맥주를 유통하기 쉽고 레저 붐을 타고 호평을 받으며 발매와 동시에 큰 인기를 얻게 된다.


1977년, 드래프트 캔맥주를 대신하여 알루미늄 캔맥주를 발매한다. 알루미늄 캔은 1971년 아사히 맥주가 일본 최초로 발명한 것으로 맥주의 품질을 유지하고 가벼워서 수요가 증가한다.


2002년, 아사히 맥주와 포괄적 업무 제휴를 맺는다. 2003년에 나고 공장에서 아사히 슈퍼 드라이를 생산한다.


2015년, 드래프트 맥주를 리뉴얼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입힌다. 탄생 50주년을 맞아 상쾌한 맛을 더한 새로운 맥주를 발매한다. 원색 계열의 디자인은 샴페인 골드 색상에 맞춰 변경을 준다. 세 개의 별과 오리온 로고를 입히고, 오키나와의 태양을 의미하는 빨강, 하늘을 의미하는 파랑, 바다를 의미하는 초록과 맥주를 의미하는 골드를 사용하였다.


한때 오리온 맥주는 오키나와 이외에서는 마실 수 없는 지역 맥주였다. 하지만 1990년부터 일본 수도권에서 오리온 드래프트 맥주를 판매하고 1995년에 도쿄 영업소를 설립하는 등 꾸준한 활동으로 이제는 일본 전 지역에서 마실 수 있는 맥주가 되었다. 2017년, 오리온 맥주는 일본 내에서 1%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오리온 맥주는 오키나와를 재건하기 위한 꿈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오키나와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가게

https://www.orionbeer.co.jp/ko/place/bar.html




사진 출처 : 오리온 맥주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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