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맥주의 역사 (1)
백경학의 <유럽 맥주 여행>이라는 책에는 기네스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저녁 무렵 시골 펍에 동양인 부부가 들이닥치자 노인들은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내가 기네스 두 잔을 주문하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왜 하필이면 그 맛없는 맥주를 시키느냐, 이 동네에선 머피스(Murphys)나 킬케니(Kilkenny)를 마셔야 한다고 추천했다.” 킬케니는 이미 마셔본 적이 있다. 기네스보다 맑고 청량했던 붉은색 맥주로 기억한다. 머피스는 이번에 처음으로 마셔봤다. 마침 일본 출장 중에 돈키호테에서 발견했다. 무려 458엔이었다. 라거에 비해 에일 맥주 맛을 모르는 나는 머피스도 기네스처럼 질소 위젯을 담고 있어 상당히 비숫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일랜드의 에일 맥주의 역사가 상당히 궁금해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기네스와 킬케니, 머피스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어 졌다. 그리고 우연히도 이번 출장에 책 한 권을 들고 왔으니 그 책이 바로 ‘기네스’였다. 자연스럽게 기네스 역사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기네스의 이야기는 기네스의 아버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아서 기네스의 아버지인 리처드 기네스는 카운티 킬데어의 부유한 개신교 목사인 아서 프라이스의 집사로 일했다. 그는 가축을 돌보고, 농작물도 재배했으며, 집세를 거두는 일, 건물 관리 등의 일을 했다. 그리고 맥주를 양조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그가 만든 흑맥주는 품질이 뛰어나 주위에서 평판이 좋았고 그의 맥주를 마시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양조 비법을 공개하지 않아 온갖 억측이 파다했다. 보리를 너무 오래 볶아서 흑맥주가 됐다는 등, 수도승의 맥주 비법을 훔쳐 왔다는 등. 리처드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양조 기술을 아서 기네스에게 전수했다. 뿐만 아니라 기네스는 프라이스 주교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읽기, 산수, 서법 등 당시에 사업에 필요한 지식을 두루 갖추었다. 기네스는 1752년 프라이스 대주교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라이스 주교 곁에서 일했다. 18세부터 28세까지 십여 년 동안 이주 기본적인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실력을 쌓았기에 사업가의 고통과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742년, 기네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가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고 기네스의 삶은 몹시 어려워졌다. 1752년, 프라이스 대주교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 리처드 기네스와 아서 기네스에게 각각 100파운드를 남겼다. 이는 당시 4년 치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대주교가 죽은 지 석 달 후 아버지는 화이트 하트(white hart)라는 여관 겸 술집을 운영하는 셀브리지의 엘리자베스 클레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리처드는 이 술집을 직접 관리하였으며 기네스는 아버지를 도와 맥주를 제조하며 실력을 쌓았다.
1755년 기네스는 셀브리지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레익슬립(Leixlip)이라는 곳에 조그마한 양조장을 차렸다. 화이트 하트와 레익슬립에서의 맥주 양조는 기네스에게 특별한 훈련이 되었다. 1759년에 기네스는 더블린으로 이사해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네스는 더블린에서 맥주 양조를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삼을 결심을 했다. 당시 한창 유행했던 진의 반대급부로 맥주가 뜨기 시작했다. 진은 하층민들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진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사람들의 정신은 피폐해졌고 게으르고 이기적이며 난폭해졌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맥주는 건강하고 안전하며 사회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회에 기여하는 음료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안고 기네스는 맥주 사업을 자신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뛰어든 것이었다.
1759년, 더블린의 리피 강이 흐르는 성 제임스 게이트가 있는 곳에 양조장을 설립했다. 작고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사용 중단된 양조장을 계약금 100파운드를 내고 9천 년간 매년 45파운드를 지급하는 역사상 가장 독특한 계약이었다.
이십 년간 경영난에 허덕이면서도 품질과 인지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고, 1779년에 더블린 성이 인정한 공식 맥주 업체가 되었다.
기네스는 1761년 6월 17일에 올리비아 화이트모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상류 사회 출신으로 지참금만 1,000파운드를 가져온 부자였다. 올리비아의 집안은 금융계 거물이었으며, 더블린에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기네스와 올리비아 사이에는 딸 넷, 아들 여섯이 있었는데, 유산을 모두 11번을 했으니, 무려 21번의 임신을 한 셈이다. 열 자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호세아, 아서, 에드워드, 올리비아, 벤자민, 루이자, 존 그라탄, 윌리엄 루넬, 메린 앤이었다.
1766년. 아버지 리처드 기네스가 세상을 떠났다.
기네스는 처음에 에일 맥주와 흑맥주를 모두 만들어 냈는데, 흑맥주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영국의 가격 통제 정책 때문에 한동안 에일 맥주만 생산했다. 흑맥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1799년 기네스는 에일 맥주 생산을 중단하고 포터 맥주 생산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1782년 아일랜드가 일시적으로 영국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의회는 기네스 맥주를 아낌없이 후원하면서 기네스 맥주도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1801년 영국은 합동법(Act of Union)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무효화하고 두 나라를 다시 합병해 버리지만 기네스 맥주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아서 기네스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맥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타운 포터, 컨트리 포터, 키핑 포터, 슈페리어 포터 등 새로운 흑맥주를 계속 생산해 냈다. 기네스는 1803년 1월 23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녀들이 아서 기네스의 땀으로 세워진 기업을 이어받았다.
끝으로, 기네스가 얼마나 대담한 사람인 지를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글을 마친다.
1771년, 더블린에서 아서 기네스는 수로의 벽을 허물고 리피 강에서 사유지로 물을 끌어왔다. 하지만 강물의 소유권은 시에 있으므로 관계 당국은 그가 주제넘은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관계 당국이 기네스에게 절도와 다름없는 짓을 그만두라고 경고하자 그는 오히려 “군대를 풀어서라도 강을 수호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 갔지만 여러 해 동안 판결이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기네스는 더블린에서 명망 있는 맥주 양조업자가 되었기에 보안관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결국 기네스가 매년 10파운드라는 저렴한 사용료를 내는 조건으로 소송을 취하했다.
참고 문헌
1. <착한 맥주의 위대한 성공, 기네스>, 스티븐 맨스필드 저, 브레인스토어(BRAINstore), 2010년 10월 22일
2. 기네스 홈페이지 https://www.guinn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