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 맥주의 역사 (2)
기네스와 아내 올리비아 사이에는 딸 넷, 아들 여섯이 있었는데, 유산을 모두 11번을 했으니, 무려 21번의 임신을 한 셈이다. 열 자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호세아, 아서, 에드워드, 올리비아, 벤자민, 루이자, 존 그라탄, 윌리엄 루넬, 메린 앤이었다.
아서 기네스 2세(Arthur Guinness II, 1768-1854)
앞서, 아서 기네스에게는 열 명의 자식이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위대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기네스의 자식도 아버지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버지만큼 출중하지도 않은 것 같다. 첫째 아들 호세아는 성직작의 길울 걸었으며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워 기네스 가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장녀인 앨리자베스는 사업가와 결혼하여 번창하였던 때도 있었으나 사업이 어려워 지자 맥주 공장에 손을 벌렸다. 올리비아는 어린 나이에 죽고, 루이자와 매리 앤은 성직자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수시로 맥주 공장에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철강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크게 망하여 큰 빚을 지고 숨어 지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서 기네스 2세가 가족 부양과 공장 운영을 모두 떠안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서 기네스 2세는 아버지의 능력을 이어받았던 것 같다. 그는 십수 년간 아버지 밑에서 일하면서 공장 경영을 전수받을 수 있는 사업가로 성장했다.
아서 기네스 2세가 아버지와 같이 공장을 운영했던 1803년에는 1800년에 비해 맥주 판매량이 두 배나 늘었다. 또한 아서 기네스 2세는 아버지와 함께 에일 맥주 생산을 중단하고 포터 맥주 생산에만 주력했다. 아버지 기네스는 회사 이름을 ‘기네스, 아서 앤 선(Guinness, Arthur and Son), 맥주 양조 업체’로 바꿀 정도로 아서 기네스 2세를 무한히 신뢰하였다. 1816년 즈음에는 기네스 포터 맥주가 영국 맥주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네스 맥주는 중앙 아메리카나 서아프리카 등의 영국 식민지 국가에 수출되었다. 그야말로 기네스는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네스 맥주의 경영에 어려운 적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군수품 수요는 줄었으며 실업자가 늘어나자 경기가 불안정해졌다. 여기에 감자 농사마저 흉작이 되어 맥주 시장도 점점 기울었다. 기네스 맥주는 1815년 6만 6천 배럴을 팔았으나 8년 후인 1823년에는 고작 2만 7천 배럴 밖에 팔지 못했다.
아서 기네스 2세는 1793년 메리언(Merrion) 출신의 벤자민 리의 딸인 앤 리(Ann Lee)와 결혼하여 1795년 윌리엄, 1979년 아서 리, 1798년 벤자민 리를 낳았다. 맥주 공장과는 잠시 멀어진 적이 있었는데, 이 시기 금융 분야에 수완을 발휘하여 크게 인정받았고, 1820년에는 아일랜드 뱅크의 지사가 되었다.
아일랜드 경제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1800 연대 초반 기네스 맥주공장은 서서히 회복했다. 1821년에 3만 배럴을 기록했던 판매량은 1828년 4만 2천 배럴, 1833년 6만 8천 배럴로 증가했다.
1843년 아일랜드에는 엄청난 마름병으로 인해 감자를 하나도 수확하지 못하는 대흉작이 발생하였다. 이 흉작으로 인해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수 천명의 군중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런 비극적인 시기에 아서 기네스 2세는 아들 벤자민 리를 설득하여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사회에 공헌하고 자선 활동을 하였다. 아서 기네스 2세는 1855년 6월에 8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벤자민 리 기네스(Benjamin Lee Guinness, 1798-1868)
아서 기네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장남인 아서 리가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맥주 공장의 경영권은 벤자민 리에게 돌아갔다. 벤자민 리는 16세에 견습공으로 맥주 공장에 입문하여 22세에 공동 경영자의 자리에 올랐다. 벤자민은 아버지 아서 기네스 2세가 금융 사업으로 한눈을 팔 때 실질적으로 맥주 공장을 경영하며 공장을 확장시켰다. 1860년부터는 해외 마케팅에 힘써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기네스 맥주를 공급했다. 기네스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하프 문양도 벤자민 리가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하프는 아일랜드 국민들이 자부심과 애착을 갖는 물건으로, 그들은 애국심의 표현으로 기네스 맥주를 즐겨 마셨다.
벤자민 리는 성 패트릭 성당을 복구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성 페트릭 성당은 아일랜드 기독교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장소였으며 아일랜드 국민이 자부심을 갖고 있던 건물이었다. 이러한 벤자민 리의 막대한 후원에 사람들이 기네스 맥주를 보는 시선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네스는 1837년에서 1887년 사이에 매출이 무려 30배나 늘었다. 벤자민 리는 1868년 5월 19일에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에드워드 세실 기네스(Edward Cecil Guinness, 1847-1927)
벤자민 리에게는 아서 에드워드와 에드워드 세실이라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서 에드워드는 가업을 잇기보다는 정치에 입문하기를 원해, 에드워드 세실이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에드워드 세실이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할 무렵인 1868년에 35만 배럴을 생산하였는데 1876년에는 77만 배럴을 생산하였고, 1886년에는 120만 배럴을 생산하였다. 1800년대에 사업이 급속도로 번성하여 공장이 부족하게 되었다. 1870년에서 1876년 사이에는 공장을 거의 다 새로 지었다. 새로운 공장에는 철도 시스템, 통 제조 시설, 보리 맥아 제조 시설 등을 모두 갖추었다.
1886년에는 회사를 상장시켰다. 회사를 상장한 그날 아침 1시간 만에 모든 주식이 다 팔릴 만큼 인기가 좋았다. 에드워드 세실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는 1889년에 마련한 기네스 트러스트(Guinness Trust) 기금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기금으로 아이바 트러스트를 탄생시켜 현재까지 아일랜드의 하층민을 도와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기네스 집안의 오랜 가훈으로 사람들이 기네스를 착한 맥주로 기억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참고 문헌
1. <착한 맥주의 위대한 성공, 기네스>, 스티븐 맨스필드 저, 브레인스토어(BRAINstore), 2010년 10월 22일
2. 기네스 홈페이지 https://www.guinn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