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Dec 08. 2018

기네스 맥주의 역사, 기네스북과 위젯의 탄생

기네스 맥주의 역사 (3)


1. 기네스 맥주의 역사 - 아서 기네스 이야기

2. 기네스 맥주의 역사 - 기네스 가문 이야기

3. 기네스 맥주의 역사 - 기네스북과 위젯의 탄생




기네스 맥주애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33년 남극에 온 탐험대는 1929년에 남극에 왔던 탐험대가 머물렀던 장소에서 기네스 4명을 발견했다.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 산맥의 힌두쿠시를 여행하다가 기네스를 파는 사람들을 만났다.


1888년 158만 배럴을 생산했던 기네스 맥주 공장은 1889년에 208만 배럴, 1909년에 277만 배럴, 1914년에는 354만 배럴로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잘 나가던 기네스 맥주도 시련은 있었다. 첫 번째는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었다. 4년 간 이어진 전쟁으로 기네스 직원의 20%가 자원입대하였고, 기네스의 매출도 2년 만에 10%나 급감했으며, 1917년에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네스는 자원입대한 직원들의 자리를 보존해 주었으며, 군 복무 기간에도 월급의 절반을 계속 지급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펼쳤다. 두 번째 시련은 영국 의회가 맥주에 대한 세금을 올리고, 맥주의 그래비티를 낮추는 법을 제정한 것이었다. 맥주의 그래비티를 낮추는 것은 알코올 도수를 낮추는 것이기 때문에 맥주의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 의회는 술집의 영업을 11시까지만 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기네스 맥주의 매출에 큰 타격을 입혔다. 또 다른 위기는 당시의 아일랜드의 정세 변화였다.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열망이 커져, 영국의 자치권을 얻는 정도의 분리를 지지하는 자와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자로 나뉘었다. 결국 북아일랜드의 일부 주만 영국에 남고 독립을 얻을 수 있었는데, 기네스 가문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반대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대립은 기네스 맥주 공장에서도 싸움으로 번져 골칫거리가 되었다. 기네스의 위기는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미국이 1920년부터 금주법을 시행하면서 미국 시장을 통째로 잃어버렸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등에서는 현지 맥주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기네스를 위협했다.


기네스가 위기를 극복한 것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뛰어났던 것은 광고였다. 일찍이 에드워드 세실 기네스는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절대로 광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전쟁이 끝난 1920년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에드워드 세실은 기네스 최초의 마케팅 전략가인 벤 뉴볼드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가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 광고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27년 10월 27일에 에드워드 세실은 세상을 떠났다.


루퍼트 에드워드 세실 리 (Rupert Edward Cecil Lee, 1874-1967)


기네스 대표직은 에드워드 세실의 장남인 루퍼트(Rupert)에게 돌아갔다. 당시 53세였던 루퍼트는 공장 경영 경험이 전혀 없었다. 루퍼트는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고 맥주보다는 여행과 공상을 좋아했다. 기네스의 이사회는 이러한 루퍼트에 우려를 표했다. 1927년 루퍼트가 돌아왔을 때는 기네스도 많이 변해있었다. 공장의 크기는 이제 철로가 아니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생산되는 맥주의 라벨만 모아 놓으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남을 정도였다. 루퍼트가 경영을 맡을 즈음 세계는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로 불리는 뉴욕 증권 시장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기네스의 매출은 1927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 위기를 극복한 것도 역시 광고였다. 1930년대 기네스 매출은 광고에 힘입어 크게 증가하였다. 성 제임스 게이트 공장 외에 파크 로열(Park Royal) 공장을 추가로 지었고 미국에도 공장을 세웠다.

루퍼트 에드워드 세실 리 (Rupert Edward Cecil Lee, 1874-1967)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기네스가 군인들의 휴식이 되었다. 기네스는 영국과 아일랜드 군인들에 맥주를 공급했다. 맥주는 군인들에게 고향을 생각나게 하면서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기네스는 1939년 12월 프랑스의 침공을 앞둔 크리스마스 저녁에 최전방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맥주 한 병씩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 맥주를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기네스를 퇴직한 노동자들이 힘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동안 기네스 공장은 독일군의 공습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루퍼트의 장남이 죽었으며,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광고 아이디어를 냈던 뉴볼드를 잃었다. 뉴볼드는 기네스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냈던 인재였기에 그의 죽음은 굉장한 손실이었다.


다행히도 루퍼트는 뉴볼드가 죽기 1년 전에 휴 비버(Hugh Beaver)라는 또 다른 인재를 기용하여 그를 보좌하게 했다. 휴 비버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기네스의 긴 슬럼프는 끝날 것이며, 비즈니스는 금방 확장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공장을 확장했고, 무엇보다 기존의 광고를 더욱더 강화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스타우트 맥주가 든 수천 개의 미니어처 병을 판매하여 사상 초유의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기네스 양조 역사 200주년을 기념해 38척의 배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띄어 15만 개의 병을 던져 넣는 이벤트를 하였다. 이 병에는 소책자, 황금색의 특별한 기네스 스타우트 라벨, 설명서 등이 들어 있었다. 휴 비버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네스북의 발명일 것이다. 휴 비버는 친구와 함께 사냥을 하다가 영국에서 사냥감이 되는 새 중에서 어느 새가 가장 빠른 지에 대한 언쟁이 붙었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자 각종 이야깃거리나 통계를 묶은 책을 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네스북은 영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7천만 부 이상 팔리면서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기네스북의 인기는 기네스라는 브랜드를 널리 퍼지게 하는 효과를 냈다.  


1950년대 전 세계적으로 라거 맥주가 인기를 끌자, 흑맥주의 인기를 높일 방안을 강구했다. 당시의 기네스 흑맥주는 술집에서 판매할 때 탄산가스가 일정하지 않게 나오는 경우도 있었고, 맥주통에 잔고장도 많았으며, 바텐더에 따라 맥주 맛도 달라졌다. 휴 비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언제 어디서든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드라우트 프로젝트(Draught Project')를 가동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는 금속통의 내부를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스타우트 맥주를 담고, 한쪽에는 이산화탄소와 질소 혼합물을 담아, 스타우트 맥주에 이산화탄소와 질소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훗날 캔맥주가 인기를 끌자 더 참신한 방법으로 계승되었다.


1985년 500ml 캔의 바닥에 플라스틱 디스크를 삽입하는 '인-캔 시스템(In-Can System)'이 등장하였다. 일명 '위젯(Widget)'이라 불리는 둥근 공이 캔 맥주에 내장되어 있다가, 캔을 열면 질소를 방출하여 맥주 표면에 기네스 특유의 거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전 세계 라거의 인기는 더 대단했다. 기네스는 스타우트 맥주만 고집했던 창업주 아서 기네스의 결정을 버리고 '하프 라거(Harp Lager')라는 황금빛 맥주를 출시했다.


아서 프랜시스 벤자민 기네스 (Arthur Francis Benjamin Guinness, 1937-1992)


1962년 88세인 루퍼트는 경영권을 25세의 '아서 프랜시스 벤자민'에게 상속하였다. 벤자민은 맥주 공장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가업을 이어받을 뜻도 없었다. 하지만 경영권을 이어받은 벤자민은 회사를 변화시켰다. 이제 기네스는 집안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기네스는 프리미엄 위스키 제조 업체를 인수하는 등 맥주 제조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쳤다. 1986년 벤자민은 50세도 안된 나이에 기업 총수 자리에서 물러나 사장이라는 직함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기네스 역사상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것이었다. 기네스 가문이 경영에서 손을 뗀 후에도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1983년 순자산 2억 5천만 파운드였던 기록이 불과 4년 후에는 10억 파운드로 네 배 이상 성장했다.


 





참고 문헌

1. <착한 맥주의 위대한 성공, 기네스>, 스티븐 맨스필드 저, 브레인스토어(BRAINstore), 2010년 10월 22일

2. 기네스 홈페이지 https://www.guinness.com


매거진의 이전글 기네스 맥주의 역사, 기네스 가문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