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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May 03. 2019

4화 오키나와에서 단 한 곳만 허락된다면

복을 부르는 숲과 바다가 맞닿은 그 곳, 비세자키




비세자키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다.


오키나와의 단 한 곳만 허락된다면 주저 없이 이 곳에 오겠다. 이 곳에 학점을 주자면 A학점이다. 내 기준에서 A학점이란 여행 전 기대한 곳이었는데 실제 와보니 그 기대를 뛰어넘은 곳을 말한다. 기댓값과 실제값의 상관관계 그것이 나의 여행 학점이다.



#비세


우선, 명칭에 대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처음 이 곳의 명성을 듣고 구글맵에서 어디를 찍고 가야 할지,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할지 헷갈렸다. 누구는 비세자키라고 하고, 누구는 비세후쿠기라고 하고. 비세는 오키나와 북부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오키나와현 구니가미군 모토부조. 비세 지역은 널리 알려진 츄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비세 지역에는 아주 오랜 전부터 가로수와 방풍림 역할을 하는 후쿠기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이 곳의 구획은 마치 바둑판처럼 잘 짜여 있는데 블록과 블록 사이에 후쿠기 나무들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늘어선 가로수 길이가 대략 1km 정도이고 나무의 수는 대략 2만 개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 곳의 이름을 비세의 후쿠기 가로수 길이라 불렀다.



#후쿠기


후쿠기 나무가 어떤 나무일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이곳에서 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후쿠기는 망고스틴과 비슷한 열매를 맺는 나무라 한다. 학명은 Garcinia Subelliptica. 식물에 문외한이라서 어떠한 종인 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나무를 우리말로 쉽게 풀면 '복목(福木)'이 된다. 후쿠기는 복(福)자를 일본어 음독으로 '후쿠(フク)'라 하고, 목(木)자를 일본어 훈독으로 '키(ギ)'라 하여 이 두 단어가 결합된 말이다. 즉 ‘복을 부르는 나무’라는 의미이다.



#비세자키


울창한 후쿠기 숲에 깊숙이 들어가 한참을 걸으면 어느새 숲의 어둠은 사라지고 바다의 밝은 빛에 눈이 부신다. 이 곳은 땅이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곶으로, 곶을 일본어로 사키(崎, さき)라 한다. 비세자키(びせざき)는 비세의 후쿠기 숲의 북쪽에 있는 작은 곶을 말한다. 비세자키 건너편으로 작은 무인도가 있고 이 곶과 저 섬 사이에 바닷물이 느릿하게 흐른다. 간조 때가 되면 물이 왕창 빠지는데, 그러면 이 곳은 천연 풀장, 스노클링 장이 된다. 어떤 곳은 한참을 걸어도 물이 무릎 높이도 안되고, 어떤 곳은 물이 고여 스노클링 장비 없이도 물고기를 볼 수 있다. 유료이지만 주차장이 있어 아예 이 곳에 주차를 하고 비세자키와 후쿠기 가로수 길을 산책해도 좋다. 참고로 후쿠기 가로수 길 입구에는 작지만 무료 주차장이 있다.


나는 이 곳을 두 차례 와 본 적이 있다.


처음 왔을 때는 2년 전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일 때였다. 너무 더워서 아이들과 안훼는 차 안에 있겠다고 했고 나 혼자 조용히 산책을 했다. 조금 덥긴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어 황홀경에 빠져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방향도 잃고 길도 잃고 때마침 핸드폰의 배터리도 떨어져 지도도 볼 수 없었다. 더워서 흐르는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땀이 났다. 한참을 헤매다가 바닷가로 가면 낫겠다 싶어서 해변을 따라 걷다 보니 나의 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여기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바닷 쪽으로 가는 게 상책이다. 가족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났다. 가족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화장실이 급했던 아내는 '왜 이렇게 늦었냐'며 핀잔만 주고 화장실로 급히 떠났다 - 안훼의 화장실과 나의 대립관계 그것이 내 부부 생활의 0.1%는 차지한다. 아이들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좋지 않았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채 다음 여행에 다시 오기로 했다.


비세를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작년 3월의 이른 봄이었다. 첫 번째 갔을 때는 길만 헤매다가 비세자키가 있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 번째 방문은 친구들과 함께 갔는데 비세자키의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반대 방향으로 후쿠기 가로수 길을 걸었다 - 대부분 후쿠기 가로수 길 입구의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비세자키 방향으로 걷는다. 돌아오는 길은 바닷가 해변을 따라 걸었다. 3월이었지만 햇살이 너무 따가웠다. 비세 곶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 새카만 일본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남자아이가 잡은 물고기는 정말이지 이 곳에서 잡은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 큰 물고기였다. 남자아이는 주변에 있는 여자 아이들에게 만져 보라고 권하고 여자 아이들은 손을 갖다 대면서 깔깔거렸다. 시골 아이들만의 로맨스로 보였다. 노는 모습이 한국의 시골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해 이후 비세자키를 떠올리면 묘하게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걷기

 

우리 가족은 비세자키의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후쿠기 숲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가운데 길은 차도 다닐만한 큰 도로였으나 일부러 작은 길을 찾았다. 나를 빼고 가족들은 모두 함께 다녔다. 나는 조금 뒤에서 나만의 속도로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사방이 모두 후쿠기 나무 숲인 곳에 도착했다. 바둑판의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었다. 네 방향으로 사진을 찍어 봤다. 어느 방향으로 봐도 같은 모습이었다. 핸드폰도 나침반도 지도도 시계도 없이 이 곳에 갇혀 보고 싶었다. 그럼 정말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 느낌일지 모르겠다.

바둑판의 한 가운데에서 어느 방향으로 봐도 숲은 똑같다.



#소라게발견

아이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엄지손톱보다 큰 소라 껍데기이었다. 아무리 바다 옆이긴 하지만 숲 속에 소라 껍데기라니. 아이들이 흥분한 이유였다. 그런데 갑자기 소라 껍데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인다" 아이는 소리를 질렀다.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게네"


소라게였다.

인기척을 느낀 소라게는 갑자기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사


조금 더 걸었다. 오키나와의 전통 가옥이 보였다. 이 곳은 우리나라의 민속 마을처럼 사람들이 일부 살고 있었다. 집집마다 시사가 보였다. 시사(シ-サ-, 獅子)는 오키나와 전통의 짐승 상인데 사자와 개를 닮았다. 오키나와에서 여러 종류의 시사를 보긴 했지만 이곳의 시사는 작고 앙증맞고 다양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시사, 입을 다물고 있는 시사, 앞을 보고 있는 시사, 옆을 보고 있는 시사, 혼자 있는 시사, 여럿이 있는 시사, 귀여운 시사, 근엄한 시사. 가끔씩 시사 대신 토토로가 있는 집도 있었다.

비세자키에서 만난 시사들, 이웃집 토토로도 있다.

#비세스타일


가족들은 무작정 걷고 있었다. 정말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린 듯했다. 나라도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내심 인터넷에서 찾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 방향으로 걷다가 우연히 '비세스타일'이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더워서 쉴 곳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 카페는 이 곳에서 보기 드문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커피와 아이들 음료를 주문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우치난츄 두 분이 일하고 계셨다. 이번에는 우치난츄냐고 묻지 않았다. 이제는 딱 보면 알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은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직원에게 고양이 이름이 있냐고 물으니 이름은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 고양이에게 '자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카페 비세스타일



#카페차하야부란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산책을 마치자며 서둘러 일어섰다. 걷다 보니 마음속에 점찍어 놓은 카페가 갑자기 나타났다. 커피를 먼저 마시긴 했지만 이 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 곳은 '카페 차하야부란'이라는 곳이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창이 있고, 밖으로 나오면 바다에 근접한 작은 정원이 있었다. 간단한 식사와 디저트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은 라후테이라고 하는 오키나와 돼지고기가 들어간 덮밥과 닭고기가 들어간 중국식 죽, 오키나와 소바와 한국식 비빔밥을 시켰다. 장모님은 돼지고기 덮밥이 맛있다고 하셨고, 장인어른은 오랜만에 한국식 식사에 만족하셨다. 아이들은 죽을 잘 먹었다. 의외로 오키나와 소바가 맛이 없었다 - 이번 여행에서 오키나와 소바를 두 차례 먹었는데 둘 다 만족하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니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낯선 단어가 보였다. 남자는 '이키가',  여자는 '이나구'. 직원에게 물어보니 예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오키나와 방언이라고 하셨다.

카페 차하야부란'



#스노클링


돌아오는 길은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흐린 날이어서 햇빛은 따갑지 않아 걸을 만했다. 비세자키 주차장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물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원래는 스노클링을 하려고 했으나 물이 차가워 물에 발만 담그기로 했다. 물이 완전히 빠져 어린아이도 안전하게 놀 수 있을 정도였다. 시계를 보니 1시가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장인어른은 차에서 한숨 주무시고 장모님이 나오셨다. 아이들은 고동과 조개껍질을 줍느라 정신없었고 장모님은 저 멀리서 물속을 유심히 보고 계셨다.


"다들 이리로 와바. 여기 물고기가 굉장히 많아"

저 멀리서 장모님이 외치셨다.


그쪽으로 가보니 장관이었다. 물이 빠져 물이 고인 웅덩이에 물고기들이 모여 있었다. 한마디로 천연 수족관이었다. 스노클링은 못 했지만 스노클링을 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형광 파랑의 작은 물고기가 물속에 파란 물감을 떨어 뜨린 듯 이뻤다. 주변에 있는 그곳의 일본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루루'인지 '라라'인지 라고 하는 물고기라고 말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루루도 라라도 아닐 수 있다.

 

비세자키는 물이 빠지는 오후에 천연 풀장이 되고 스노쿨링 장소가 된다.



#역사


그런데, 후쿠기 가로수 길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후쿠기 가로수는 류큐 왕국 시대인 17 세기 후반에 활약한 정치가인 사이온(蔡温, さいおん)이라는 인물이 중국에서 배운 풍수 사상을 응용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후쿠기 나무는 성장이 매우 더딘 나무이다. 이 곳 후쿠기 나무 중에는 260년 이상된 나무도 있다고 한다. 후쿠기 묘목을 심은 류큐 왕국의 선조들은 아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과 미래를 위해 심었을 것이다. 오키나와는 여름에는 태풍이 심하고 겨울에는 북풍이 분다. 후쿠기 나무 숲은 예로부터 방풍림으로 사용되었다. 오래전 류큐 선조들의 지혜를 후손들이 쓰고 있다.


#에필로그

비세자키는 한낮도 좋지만 굳이 좋은 시간대를 택하라면 새벽이라고 현지인들은 말한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아침 햇살이 어우러져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아니면 방파제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점점 밝아져 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 비세자키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비세자키 주변의 숙소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비세자키 주변에는 좋은 숙소가 많다. 다음을 기약해 본다.



제목 사진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UghHZmnJw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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