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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May 06. 2019

5화 슈리성으로 오르는 언덕길

feat. 오리온 맥주




아침 9시, 슈리성으로 출발했다.

 

슈리성을 관람하기에 가장 좋을 때를 생각해보니 역시 아침일 것 같았다. 슈리성이 있는 동네는 한적했다. 길은 깨끗했다. 일본 소도시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슈리성은 복잡했다. 유명 블로거들이 슈리성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은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주차장은 잘 찾았으나 만차였다. 주차 요원의 안내에 따라 임시 주차장을 찾았다. 하지만 주차장을 지척에 두고 지나치고 말았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번엔 창문을 열고 길 건너 주차 요원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주차장이 어디인가요?” 역시 방금 지나친 바로 그곳을 가리켰다. “얼마나 걸리나요?”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도노구라이 가카리마스까?” 어설픈 일본어로 조금 더 크게 물었다. 이번엔 대답이 너무 길었다. 내가 기대한 대답은 ‘5분’과 같은 단답형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특유의 길고 친절한 대답이 이어졌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인에게 길을 물으면 공통점이 있다. 내가 알아듣던 알아듣지 못하던 그들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런데 말이 너무 많고 빨라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 나는 그냥 내가 묻는 말에만 간단히 답해 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임시 주차장은 잘 찾았다.


슈리성 주차장 구글맵 : https://goo.gl/maps/7k66FFLCz5WDc1k48


슈리성 임시 주차장 구글맵 : https://goo.gl/maps/4VsZTgrXgimsbPbE7



임시 주차장에서 오르막 길을 걸었다. 슈리성에 오르는 언덕길이 아니라 슈리성 입구에 오르는 언덕길을 걸었다. 저 멀리 슈리성 입구가 보였다. 그동안 책과 인터넷에서 수 없이 봐 둔 모습이었다. 혼자만의 여행이었다면 이 정도로 봐 두지 않았을 텐데 가족의 여행 가이드가 되기 위해서 많이도 공부해 놨다. 슈리성 입구에 있는 휴게소 ‘스이무이칸’에서 당과 수분을 보충하고 짐을 보관한 후 본격적으로 성에 오를 채비를 했다. 오리온 맥주도 하나 챙겼다. 옛날 이 언덕길을 따라 슈리성에 올랐을 류큐 왕족들을 상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류큐는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던 오키나와의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슈리는 류큐 왕국의 수도였다. 오키나와에서는 12세기경부터 각 지역에 호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족들은 흥망을 거듭한 끝에 호쿠잔(北山), 츄우잔(中山), 난잔(南山)이라는 세 개의 소왕국을 형성했고, 그중 슈리와 나하를 기반으로 하는 츄우잔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였다. 이것이 류큐 왕국이며, 1429년의 일이다. 류큐 왕국은 중국과는 조공무역을 하고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의 나라들과는 중개 무역을 하면서 성장해 갔다. 특히 중국의 물품을 수입하여 일본에 수출하고, 일본에서는 차나 다시마, 건조한 해산물 등을 수입하여 중국 각지에 팔면서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있어 왔다고 전해진다. 류큐의 왕은 왕국이 크게 번성하자 각 지역의 정치 지배 세력을 슈리에 불러들여 함께 살게 하면서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18세기 초 류큐 왕국 전체 인구 20만 명 중 2만 여 명이 슈리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슈리는 류큐 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슈리성은 류큐 왕국의 역대 왕들이 조금씩 정비해 가면서 점차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슈레이몬(しゅれいもん, 守門, 수례문)


스이무이칸을 나오니 바로 ‘슈레이몬’이 보였다. 슈레이몬은 슈리성을 오르는 언덕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문이다. 우리 말로는 수례문이라고 하는데 ‘예절을 지킨다’라는 뜻이 있다. 이 문은 슈리성의 성곽에 붙어 있는 문이 아니고 성곽 밖 언덕길에 있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 밖에 서 있는 듯하다. 문에는 '守禮之邦(수례지방)'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있다. '류큐는 예절을 중요시하는 나라이다'라는 뜻이다. 이 문은 16세기 중순에 건립되어 193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오키나와 전투 때 소실되어 1985년에 복원된 것이다. 참고로 슈레이몬은 2000년에 발행된 2천엔 지폐 속에도 담겨 있다. 2천엔 지폐는 일본에서는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오키나와에는 조금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오른쪽 사진 출처 : http://www.tabirai.net



류큐 왕국이 예절을 중시하고 평화로운 나라였기 때문였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을 위한 물자를 조달해 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한 일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류큐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도요토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막부는 임진왜란 때 도와주지 않은 보복으로 사츠마 번 시마즈 가문의 류큐 침략을 승인한다. 독립된 류큐 왕국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1609년 시마즈 가문이 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병사를 이끌고 류큐 왕국을 침공하였다. 슈리성은 포위된 지 3일 만에 함락되었다. 왕은 항복을 선언했고 성 안의 보물들이 약탈당했다. 임진왜란 때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은 핑계일지 모른다. 류큐는 조공 무역과 중개 무역으로 꽤 번성했던 나라였다. 이런 류큐 왕국을 빼앗아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 등 잇따른 전쟁으로 인해 궁핍해진 재정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 목적일지 모른다. 일본은 류큐 왕국을 일본에 편입시키지 않았고 겉으로는 독립국가로 유지시켰다. 그래야만 류큐가 중국과 조공 무역을 계속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슈리성은 여러 번 소실되고 재건과 중수 공사가 거듭되었다. 낡은 건물을 손질하고 다시 고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은 점점 화려해지고 위엄을 갖추어갔다. 왕국의 마지막 중수 공사는 1864년이었다.

 


칸카이몬(かんかいもん, 歓会門, 환회문)


슈레이몬에서 언덕길을 따라 백 미터 정도를 걸었다. 한자로 ‘환회문’이라고 쓰여 있는 칸카이몬이 보였다. 칸카이몬은 슈리성 성곽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칸카이(환회)라는 뜻은 '기쁘게 환영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옛날에 중국의 책봉사나 사신을 영접할 때 환영한다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문의 양측에는 '시사'가 서 있었다. 시사는 오키나와의 수호신으로 사자나 개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일종의 스핑크스 같은 것이다. 시사는 오키나와에서 액운을 물리치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긴다. 시사가 양측에 서 있는 것은 하나는 암컷이고 하나는 수컷일 텐데, 일반적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수컷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수컷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칸카이몬은 1477년에서 1500년 무렵 창건되었지만 오키나와 전투로 소실되어 1974년에 복원된 것이다.

오른쪽 사진 출처 : http://www.tabirai.net



류큐는 예를 다해 손님을 영접하고 기쁘게 환영했던 나라였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출현했다. 에도 막부 말기,  류큐는 미국과 유럽의 함선이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서구의 열강들은 종종 함대를 이끌고 해안에 출몰하며 류큐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끌고 슈리성을 방문하였다. 끊임없이 일본 개국을 요구했던 페리 제독은 개국이 실패할 경우 류큐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류큐의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서구 국가들이 류큐를 점령할 것이 두려웠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삼고 국왕을 번주로 정했다. 류큐번이 설치된 7년 후인 1879년에는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는 ‘류큐 처분’을 강행하고 일본 정부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슈리성을 비우게 했다.


슈리성은 황급하게 비워졌고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어 오키나와 파견병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슈리성의 정전은 병사들의 침실로 사용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관사나 병실로 사용되었다. 병사들은 벽면이나 바닥판을 벗겨내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정전의 용 기둥도 절단하기도 하였다. 장식품과 그림들도 모두 제거되었고 지붕의 기와는 바람에 날아갔다. 그야말로 슈리성은 참혹한 수준으로 변해갔다. 오키나와 파견병이 떠난 후 슈리성은 슈리구에 불하되었다. 그 후에는 각종 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슈리성 일대를 공원화하자는 계획, 오키나와현 신사를 창건하자는 계획도 있었으나 슈리성은 쓸모없는 건물로, 본토의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거슬리는 건물로 여겨져 그대로 방치되었다.



즈이센몬(ずいせんもん, 瑞泉門, 서천문)


칸카이몬을 지나 언덕일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아직 4월이었지만 햇빛이 강해 조금 덥게 느껴졌다. 슈리성의 성벽은 여러 겹이 중첩되어 있고, 각 성벽마다 들어가는 문이 있기 때문에 문과 문 사아의 거리가 짧았다. 칸카이몬에서 50미터 정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니 슈리성에 오르는 두 번째 관문인 즈이센몬이 나왔다. 일본어로 즈이센몬(ずいせんもん)은 한자로는 서천문(瑞泉門)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경사스러운 샘물이 흐른다’라는 뜻이다. 이 문의 옆에 ‘류히’라는 샘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이다. 즈이센몬은 1470년 경에 세워져 오키나와 전투 때 소실되었지만 1992년 다시 복원된 것이다.


즈이센몬



슈리성은 실질적으로 일본이 지배한 이후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슈리성의 마지막 호흡기를 떼어 버리기로 결정했다. 완전히 철거가 될 뻔한 슈리성을 살려낸 건 ‘가마쿠라’라는 인물 덕택이다. 기마쿠라는 오키나와에 파견된 적이 있는 교사였으며 미술을 전공한 학생이었다. 가마쿠라는 오키나와와 슈리성에 매료되어 슈리성 보존에 한 평생을 받쳤다. 1924년 슈리성의 철거 기사를 접한 그는 평소 친분이 있는 건축학자이자 정부의 자문인 ‘이토’씨를 찾아가 슈리성 정전 철거를 막아 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가마쿠라와 이토의 노력으로 슈리성의 철거는 중지되었다. 오늘날 가마쿠라의 노력과 그의 자산이 없었다면 슈리성을 다시 볼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고마운 인물이다.


1933년에는 슈리성의 대대적인 보수가 완료되었다. 이 공사는 1928년부터 시작하여 예상보다 훨씬 많은 예산을 사용했다. 그래도 부족한 예산은 어찌하지 못하여 계획했던 보수 전부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했던 가마쿠라도 세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슈리성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로우코쿠몬(ろうこくもん, 漏刻門, 누각문)


즈이센몬을 지나 약간의 계단을 걸으니 바로 로우코쿠몬이 보였다. 문과 문 사이가 이렇게 가까워도 되나 싶을 정도의 거리였다. 로우코쿠몬은 슈리성에 들어가는 세 번째 관문이다. 누각(漏刻)은 한자로 물시계를 의미하는 말로 누각문은 ‘시간을 측정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문 망루에 수조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서 물이 새는 양으로 시간을 측정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측정되면 북을 치며 슈리 성내의 서쪽 전망대에 전달해 성 내외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반듯한 벽돌 하나 없이 쌓아 올린 성벽을 보면서 장인어른은 감탄하셨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라면서. 나는 장인어른께 말씀해 드렸다.


"장인어른, 그렇지만 이건 진짜가 아닙니다"


로우코쿠몬, 즈에센몬과 상당히 비슷하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슈리성은 진짜가 아니다.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처럼 대부분 복원된 것이다. 슈리성은 아쉽게도 일본과 미국의 오키나와 전투 중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시기, 오키나와는 미국에게는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고, 일본에게는 본토 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이때 슈리성은 일본군의 총사령부로 사용되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태평양 섬을 하나씩 점령에 가면서 일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미군 함대는 오키나와의 중부 자탄 지역에 상륙하여 지상군을 투입했다. 곧이어 지상군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오키나와 섬의 북부로 반은 오키나와의 남부로 전진했다. 이 83일간의 전투에 밀린 일본군은 그들 특유의 집단 자결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전쟁의 피해는 상당했다. 나하 시는 다섯 차례의 집중 폭격으로 시가지의 90퍼센트가 소멸되었다. 슈리성과 그 일대에는 포탄이 대략 20만 발, 투하한 폭탄은 1,000톤, 그리고 수천 발의 박격포가 떨어졌다. 슈리성은 말 그대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슈리성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의 건축물도, 수많은 훌륭한 공예품도 모두 소실되었다. 민간인 희생도 컸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 3만 명과 민간인 9만 명이 희생되었다. 한반도에서 강제 연행된 종군 위안부 만 명 정도도 희생되었다.



코우후쿠몬(こうふくもん , 広福門, 광복문)


로우코쿠몬을 나오니 일영대라고 하는 작은 전망대가 나왔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빠르게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어차피 우리는 서쪽 전망대에서 더 좋은 전망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는 코우후쿠몬 앞에서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문을 지나면 슈리성 정전에 들어가는 앞마당이 나온다. 이 문은 슈리성에 들어가는 네 번째 문으로 ’복을 널리 퍼지게 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류큐 왕국 시대에는 이 문에 2개의 사무소가 놓여 있었다는데 현재는 슈리성 유료 지역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 판매소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는 유료 지역에는 들어가지 않고 서쪽전망대로 향했다.



서쪽전망대, 이리노아자나(イリのアザナ)


서쪽전망대로 가는 길은 고요한 산책길이었다. 사람들이 이곳까지는 잘 찾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천천히 숲을 걷고 싶었으나 나만의 바람이었다. 가족들 모두 지쳐 있었기에 빠르게 전망대만 보기로 했다. 서쪽전망대는 이리노아자나라 불린다. 슈리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고 해발 130m의 성곽 위 전망대로 나하의 거리 및 바다까지 볼 수 있는 슈리성의 명소이다. 류큐 왕국 시대에는 여기에 깃발을 세우고 로우코쿠몬에서 전달된 시간을 북을 치면서 성 내외로 알렸다고 전해진다.



오리온 맥주를 피사체로 하고 전망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러고 보니 맥주 캔의 레이블이 예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앞면은 똑같은데 뒷면이 달랐다. 작년에는 보지 못 했던 거였다. 오라온 맥주는 1973년에 처음으로 드래프트 맥주를 캔맥주로 출시하였다. 현재와 같은 캔의 디자인이 만들어진 건 2015년이다. 원래는 원색 계열의 디자인이었는데 샴페인 골드 색상에 맞춰 디자인을 변경하였다. 세 개의 별과 오리온 로고를 입혔고, 세 가지 색의 물결 모양을 추가하였다. 빨강은 오키나와의 태양을, 파랑은 오키나와의 하늘을, 초록은 오키나와 바다를 의미한다. 올해 출시된 캔의 뒷면에는 그동안 캔맥주의 역사가 들어 있다.



서쪽 전망대를 끝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슈리성 입구와 출구가 달랐는데 그걸 모르고 입구로 다시 내려가려 했다. 입구에서 뭐라 하는데 무시하고 내려가다가 깨달았다. 출구는 저쪽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슈리성을 도면이나 설계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고문서 때문이었다. 그것을 류큐 조상신이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1950년,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슈리성 터에 류큐 대학이 건립되었다. 미 군정의 맥아더는 오키나와인의 본토 유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인과 본토인이 일체감이 형성되어 오키나와를 본토로 복귀시키려는 운동을 우려했다. 다소 정치적이지만 류큐 대학은 오키나와가 일본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류큐 문화의 독자성을 내세우기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또한 미국의 통치를 보조하기 위해 오키나와인 전문 인력을 양성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런 것이라면 류큐 왕국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이었던 슈리성 터야말로 대학 부지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류큐대학은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후 1977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84년까지 현재의 지역인 니시하라의 치하라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슈리성의 복원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류큐대학이 이전되면서 슈리성은 복윈 될 수 있었다. 슈리성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 대 부터이다. 슈리성을 복원하기 위해 건축, 토목, 역사, 고고, 공예, 미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구성하여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복원을 위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그러던 중 ‘치수기(寸法記)’라는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치수기는 1768년에 작성된 문서로 1709년에 화재로 전소된 슈리성의 주요 시설을 재건하기 위한 설계도였다. 슈리성은 결국 1992년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슈리성은 2000년에 복원된 건물이 아닌 슈리성이 세워진 성터가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몇 권의 책에서 배웠다. 특히 <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에서 평생 슈리성 보존에 힘쓴 인물 가마쿠라의 일생에 감명받았다. 그는 일본인에 망쳐진 슈리성을 다시 일으킨 단 하나의 일본인이었다. 제목을 이리저리 궁리했지만 책의 제목을 그대로 써보기로 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역사적 사실은 몇 개의 책과 홈페이지를 참고하였다.



참고

슈리성으로 가는 언덕길 : 가마쿠라 요시타로와 근대 오키나와의 사람들, 요나하라 케이 저, 임경택 역, 사계절, 2018년 02월 19일  

오키나와 이야기 :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아라사키 모리테루 저, 역사비평사, 2016년 10월 05일  

쇼군 천황 국민 : 에도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역사, 후지이 조지 등저, 박진한,이계황,박수철 공역, 서해문집, 2012년 08월

오키나와 사람들의 한해살이 : 시인 다카라 벤이 들려주는 오키나와 생활지, 다카라 벤 저, 김용의, 김희영 공역, 민속원, 2016년 02월 25일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호카마 슈젠 저, 심우성 역, 동문선, 2008년 01월 20일  

오키나와 슈리성 공원 홈페이지 : http://oki-park.jp/shurijo/kr/

오키나와 관광정보 : http://www.tabirai.net/s/sightseeing/feature/okinawa-kanko-selection.aspx


제목 사진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22dQUbEz8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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