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유준 Jun 13. 2022

7. 익숙하지 않은 항암치료 클리셰

 항암치료는 사실 별 거 없다. ‘클리셰‘란 틀에 박힌 장면을 뜻하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운 아픈 환자, 링거에서 떨어지는 항암제. 그런데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니 진부하게 보였던 클리셰가 가혹한 현실로 다가왔다. 

 고통스러웠던 첫 골수검사와 요추천자를 마치고 본격적인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치료의 이름은 칵테일 요법이었다. 기존의 백혈병 치료제에 글리벡을 함께 투여하는 치료로서 내가 아프기 몇 년 전부터 여러 병원에서 시도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기존의 치료법보다 완치율도 높고 항암제에 내성이 생기는 것도 막아주어서, 젊고 체력이 좋은 나에게 적합한 치료법일 것이라는 것이 담당 의사선생님의 의견이었다. 병실에 의료진이 들어와 내 왼쪽 팔목에 바늘을 꼽았고, 항암제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항암제는 암세포를 공격하는 약물인데, 문제는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다른 세포까지 죽이는 무서운 약물이었다. 그래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선택이었다. 

 항암제를 맞고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부작용이었다. 기분 탓인지 항암제 탓인지 몸에 기운이 빠졌다. 일종의 무기력증이랄까. 그것은 골수검사의 후유증인 어지러움증과 결합되어 나의 몸을 더 무겁게 했다. 그렇게 2주 정도는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입맛이 없어지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병원에서 식사가 나와도 거의 숟가락을 뜨지 못하고 반납하기 일쑤였다. 억지로 먹으면 머지않아 화장실에 가서 토해냈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티브이에서 보던 클리셰였는데 내가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참 고역이었다. 배는 고픈데 먹기는 싫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몸에 힘이 없었다. 결국엔 우유같이 생긴 하얀 영양제를 맞았다. 그렇게라도 영양을 섭취해야했다. 

* * *

 며칠 뒤 팔목에 통증을 동반한 이상 현상이 생겼다. 항암제가 너무 독해서 팔목의 얇은 혈관이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원래 히크만 카테터를 삽입하여 항암제를 투여해야했는데 내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일단 치료가 급하니 팔목에 항암제를 투여하다보니 생긴 일이었다. 감염된 팔목에 바늘을 모두 빼고 히크만 삽입을 하러 갔다. 

 히크만이란 약물 주입이나 채혈을 위해 정맥에 삽입하는 관으로서 항암 치료 등 장기간 정맥주사가 필요하거나 독한 약물을 투여하는 환자 몸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시술실에 들어가 차가운 베드 위에 누웠다. 간단한 마취를 하고 관을 오른쪽 쇄골 밑의 가슴에 꾹꾹 눌러서 넣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다. 첫 골수검사에 버금가는 고통이었다. 나중에 다른 환자들에게 물어보니 히크만 삽입은 크게 아프지 않았다는데, 나는 너무나 아팠다. 오른쪽 젖꼭지 위로 하얀색 관이 덜렁덜렁 달렸다. 마치 아이언맨이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히크만이 달렸는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정맥혈관을 찾기 위해 매번 팔목이나 손등에 바늘을 찌를 필요가 없어져서 좋았다. 

 몸에 히크만을 달아서 항암제나 여러 약물을 주입하기 간편해졌지만 소독이라는 번거로운 일이 생겼다. 히크만은 혈관과 외부를 연결시켜 감염되기 쉬웠다. 잘못관리하면 정말 큰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히크만이 막히지 않게 관리해야하고, 병원에 있을 때나 퇴원해서 휴식을 취할 때도 소독을 잘 해주어야한다. 실제로 부모님은 의료진으로부터 소독 방법을 교육 받으셨고, 내가 히크만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집에서 요양중일 때 히크만을 매일매일 소독해주셨다. 가족이 아프면 보호자도 자연스럽게 반(半)의료진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감사하고 가족이 아니면 그렇게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히크만을 삽입한 후 팔목 상태는 좋아졌지만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백혈구가 감소함에 따라 감염에 취약해졌다. 비누로 손을 자주 씻었고, 병실 안에서도 마스크를 썼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그것도 점점 익숙해졌다. 지금이야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마스크를 잘 쓰지만 2009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인들은 마스크를 거의 쓰지 않았고, 나처럼 병원에 있는 정말 아픈 환자나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만 마스크를 썼다. 그렇게 마스크는 나와 한 몸이 되어서 병실에 누워있을 때도, 병실 밖으로 볼 일을 보러 나갈 때에도 착용했다. 그때는 답답하고 환자처럼 보여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창피했지만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선 써야만했다. 창피한 것은 아프고 죽는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손을 비누로 꼭 씻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스스로 내 몸을 지키는 이런 작은 습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항암제를 맞고 부작용이 생기며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6. 굵은 바늘의 공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