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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준 Jun 16. 2022

8. 슬픈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아

‘여자는 화장발, 남자는 머리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머리카락은 남자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탈모는 암환자와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는 분명 암환자였지만 머리카락이 길고 덥수룩해서 환자인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항암제를 맞으면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말은 의료진으로부터 듣지 않아도 이미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머리숱도 많고 머리카락도 건강한데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는 머지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항암제를 맞고 하루 이틀 지나자 머리카락이 처음에는 하나, 둘씩 베개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머리카락은 더 많이 빠졌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살짝만 잡아당겨도 힘없이 푹 하고 빠져버렸다. 땜빵이 숭숭 난 머리를 보며 삭발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 * *

 힘든 몸을 이끌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 안에 있는 이발소로 갔다. 이발사는 암환자 삭발은 많이 해봤다는 듯이 삭발해달라는 나의 말에 망설임없이 바리깡을 움직였다.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나의 머리카락은 바리깡이 닿자마자 힘없이 떨어졌다. 건강하고 굵었던 머리카락이 바닥에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병원에 와서 산전수전을 겪은 나였기에 머리를 밀어서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청춘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머리빨은 남자의 생명인데 어떡하지... 왁스는 당분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울적한 감정에 비해 이발은 너무도 간단하게 끝났다. 초췌한 얼굴과 허연 환자복, 그리고 깔끔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 민머리는 내가 환자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전형적인 암환자의 모습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의 두상이 그렇게 예쁘지는 않아 실망했다. 아기 때 이후로 민머리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앨범에 꽂혀있는 아기 때 사진에는 웃고 있는 나와 어머니가 있는데, 다시 아기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진 속의 모습과 다르게 현실의 나는 이미 다 커버린 아픈 성인이었고, 어머니는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백혈병에 걸린 고등학생 여주인공과, 남자친구의 슬픈 멜로 이야기로 아프기 전에 본 드라마였다. 건강하던 여주인공이 갑자기 백혈병에 걸려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고,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다.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예쁜 여주인공이 삭발을 한 채로 남자 주인공과 투명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공간은 병동 내의 무균실이었다. 여주인공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남자친구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슬퍼한다. 

 드라마를 보며 슬퍼했지만 저런 일이 나에게도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몇 달 뒤 나는 무균실에 들어갔다). 머리가 빠질 정도의 난치병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병으로만 알았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걸린 병(림프종이 아닌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성인군에서는 10만 명 당 매년 1~2명 정도 발생할 정도로 희귀한 병이었다. 걸어가다가 새똥을 맞은 사람처럼 나도 참 재수가 없는 사람이었나. 새똥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데, 그게 하필 나였다. 나의 잘못도 아니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 *

 내가 혈액암에 걸린 이유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대 업무 때문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예상한다(물론 군대업무가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부대에서 2년 동안 보급병으로 근무하며 휘발유나 경유가 가득 든 드럼통과 페인트 등 여러 화학물질을 운반하고 관리했다. 병원에서도 저런 화학물질이 혈액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완치 후에 알게 된 지인도 나와 비슷한 20대에 군 제대 후 혈액암에 걸렸는데 유류를 취급하는 보급병이었다고 말해주어 놀랐다.

 나는 아픈 와중에 보훈대상자 등록을 하기 위해 전역한 부대에 협조도 구해보고 여러모로 알아보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가면역질환같은 내과적 질환은 눈에 보이지 않아 군대 업무와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것이 일반인 입장에서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보훈보상 대상자 신청을 하였지만 거부되었다. 군생활 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제대 후 6개월이나 지나 발병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군대로 부를 때는 국가의 아들이었지만, 아프거나 다치면 남의 아들이었다. 이래서 아프면 나만 손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나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당시에는 2년 동안 복무한 군대에 배신감을 느꼈다. 요즘엔 국가유공자 등록을 전문으로 하는 행정사무소도 많이 있으니 자문을 구하여 제대로 준비해서 신청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것이 환자는 아파서 정신이 없고, 보호자는 환자를 케어하느라 정신이 없다. 일단 환자가 건강하게 완치되는 것이 목표라서 보훈대상자 신청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찝찝한 마음은 발병한 지 10년이 넘어서도 남아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살아있어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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