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로 빠진 너의 민머리까지 좋아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정도 되자, 골수검사의 후유증과 항암제의 부작용이 점차 나아졌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가 문병을 왔다. 나는 병실에서 민머리에 비니를 쓰고, 가슴팍에는 히크만에 수액이 달려있으며, 병원이름이 세로로 써진 환자복을 입고 여자친구를 만났다. 멜로영화에서 보던 스토리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예전에는 매일 데이트하는 사이좋은 캠퍼스 커플이었지만, 아픈 후에는 치료받느라 정신이 없던 나도 그리고 그녀도 연락이 소홀해진 상태였다. 우리 둘은 어쩌면 이별을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수척해진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놀라지 않은 척 했지만 많이 놀랐을 것이다. 당사자인 나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골수검사가 너무 아팠다는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녀도 환자 앞에서 학교생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는 중간중간 끊겼고 처음에 만났을 때의 반가움도 씁쓸함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돌아갔고, 나는 병동 엘리베이터에서 배웅을 해주었다. 그녀는 슬프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주일 뒤에 우리는 전화로 헤어졌다. 역시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그녀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이십대 중반엔 사귄 지 반 년도 안 된 남자친구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내가 살지 죽을지, 건강하게 회복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기약 없는 불확실한 기다림을 해줄 것이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반대 상황이었어도 그 친구와 비슷하게 했을 것이다.
* * *
모두가 잠든 밤,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이 흘러 베개에 스며들었다. 사귈 때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여행도 같이 가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미안한 감정이 덜 들게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문득 이문세의 ‘옛사랑’이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좋아하는 노래였지만 가사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파서 이별을 하고, 또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니 온전히 나의 노래로 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는거지? 경탄스러웠다.
누가 울어도 아플 것 같이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 걸
나는 아프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해 이성적으로 대하는 편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쿨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아프니 그것은 모두 거짓된 감정이었다. 나는 아프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공감하게 되었다. 병에 걸리면서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꽤 있었다.
* * *
한편으로는 이십대의 연애가 참 가벼운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병원에 누워있을 때 내 옆을 지켜준 사람은 여자친구가 아니라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여자친구가 아니라 부인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부인은 법적으로 가족이기 때문에), 여자친구는 나와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한 상태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픈 내가 빨리 퇴원해서 그녀 옆에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관계를 빨리 끊는 것이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이득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별 당시에 많이 슬펐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나중에 몸이 나아지고 나서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혹시나 우연히 그녀를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길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가끔 이성친구에 빠져서 부모님과 친구들을 다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연애는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만, 자신이 정말 큰 위험에 빠졌거나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변했을 때에는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피가 섞인 가족들, 그리고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들이 그 자리를 채워줄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 소홀히 하지 말자. 옛사랑이 내게 알려준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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