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병원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병원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있을 때도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바깥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지만 병실 안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차분한 날들이었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이 별로 없던 때라서, 환자들은 대부분 퇴원하는 날을 고대하며 누워서 티브이를 보거나 휴게실의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재미없는 병실에서 나는 여러 취미를 가졌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음악이었다.
B병원의 병동 복도에는 전자 피아노가 있었다. 대학생 때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해서 기타와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알았다. 몸 컨디션이 좋을 때면 병동 복도의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연주를 했다. 피아노 실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헤드폰을 연결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나를 위한 연주였다. 피아니스트 이루마, 전수연 등의 뉴에이지 곡을 주로 쳤는데 마음이 차분해지고 울적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연주에 몰두할 때면 내가 환자인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집에서 휴식을 취할 때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좋아하는 가수인 김광석의 노래부터 시작해서 팝송, 가요 등 여러 노래를 서너 시간씩 불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모든 스트레스가 날아갔다. 집 안이라도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무작정 지를 수는 없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음악을 듣는 것도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고 멜로디를 따라가면 어느새 나의 마음이 정화되었다.
심리치료법 중에 음악치료가 있을 정도로 음악은 사람의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을 준다. 마음이 복잡한 사람에게는 어떤 음악이든 듣기를 추천한다. 눈을 감고 음악에 빠진다면 울적한 마음이 조금 나아질 것이다. 나처럼 긴 투병생활을 하는 분들은 악기를 하나 배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가질 수 있는 생산적인 취미는 제한적이다. 운동은 환자에게 위험하거나 다칠 위험이 있고, 공부나 무엇을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악기를 배우는 과정은 지루하지 않고,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다칠 위험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를 좋아하셨다. 그리고 나는 투병생활 중 기타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에 치료 후 대학가요제에도 나갈 수 있었다. 내가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했다면 못했을 일이다. 음악처럼 세상에 무해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까? 음악은 참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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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병원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둘째 작은아버지다. 작은아버지는 병원 근처의 시장에서 도매업을 하셨는데,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가지고 문병을 와주셨다. 작은아버지 덕분에 병원에서 먹을 수 없는 떡볶이나 순대 같은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더운 날에도 땀을 흘리시며 나를 보러 오셨다. 셋째, 막내 작은아버지도 아픈 나를 잘 챙겨주셨는데 문병도 자주 오시고, 현혈증을 모아서 주시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나에 대한 작은아버지의 애틋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여동생이 자식을 낳아서 나에게도 어린 조카가 생기니 그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친자식은 아니지만 너무 사랑스러운 기분이 들고, 피가 섞인 혈육이라 그런지 조카는 여동생도 닮고, 우리 부모님도 닮고, 나도 닮은 기분이 든다.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병원에 있으면서 친척분들께 받은 도움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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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병원에서는 불가사의한 경험도 있었다. 어느 날 친구가 오후 늦게 문병을 왔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친구와 병실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B병원은 대형 병원답게 부지가 넓었고 건물도 많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져서 어두워지는 시간이었는데 걷다보니 으슥한 곳의 낯선 건물까지 가게 되었다. 정체를 모르는 하얀 병원 건물 앞에 서자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놀라서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도 동시에 나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내가 친구에게 혹시 이상한 기운을 느꼈냐고 물었더니 친구도 방금 느꼈다고 말했다. 우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장소를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병원이라서 떠도는 원혼이 많은가 하는 얼토당토 않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 그 장소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병원은 여러모로 신비하고 무서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