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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준 Jul 08. 2022

14. 5성급 호텔보다 집이 좋아

 작년에 좋다고 소문난 제주도 신라호텔에 가보았는데 별 거 없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맛있는 호텔 조식이 있었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나의 작은 집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오래 있어보면 알게 된다. 5성급 호텔보다 집이 좋다는 것을.

 B병원에 입원할 때 꽃이 피고 있었는데, 퇴원을 할 때에는 꽃이 지고 잎이 나는 5월이었다. 다행히 첫 항암치료(관해)가 잘 되었다. 첫 치료는 두 달 입원, 한 달 통원 치료가 한 사이클이었다. 병원에서 항암제를 맞고 혈액 수치가 안 좋아지면 감염 관리를 철저히 한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 혈액 수치가 좋아지고 컨디션이 슬슬 올라오면 퇴원을 한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비축한 후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여 다음 항암치료를 받아야했다. 

 거의 두 달 만에 간 집은 참 반가웠다. 너무 오랜만에 가서 낯설기도 했다. 군대 훈련소를 마치고 첫 휴가를 갔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훈련소 생활도 입원했을 때처럼 정말 힘들었다. 유격훈련, 총검술, 화생방 등 여러 힘든 훈련을 마치고 두 달 만에 집에 갔을 때 가족이 나를 반겨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퇴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소독하셨다. 내 방의 책상과 침대도 정돈되어 있었다. 아프기 전에 공부하고 잠을 자던 나의 안식처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

 저녁에 여동생까지 모여 온 가족이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병원식이 아닌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반찬과 국물. 아프기 전에는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참 감사하게 다가왔다. 비쩍 마른 몸에 빡빡 깎은 머리, 히크만을 가슴에 달고 있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족끼리 거실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었다. 어느새 밤 12시가 넘었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내가 아픈 사실이 다 꿈이었으면...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책가방을 등에 둘러메고 학교로 뛰어갔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대문 밖을 나가는 나에게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하시고, 아버지는 신문을 보신다. 어제 꾼 꿈이 생생하고 기분 나쁜 악몽이었지’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히크만이 느껴졌고 내가 아픈 것은 꿈이 아니고 명백한 현실이었다. 대형병원에 있으며 의료진의 케어를 받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집보다는 못했다. 집에 있는 것이 확실히 심리적 안정감이 들었다. 집에서 책도 보고, 어머니랑 수다도 떨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머리에는 비니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끼고 어머니와 집 앞에 있는 하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하천을 따라 뚝방길을 걸으며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냇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5월에 피는 꽃들과 새로 나기 시작하는 초록의 잎사귀들이 천변을 메웠다. 생명력이 만발하는 봄. 암세포가 이 싱그러운 자연에 모두 녹아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히크만 소독을 했다. 히크만과 가슴 부위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조심조심 주의해서 했다. 어머니는 병원에서 미리 사온 소독액을 히크만과 상처 주위에 발라주셨다. 내가 병원생활을 오래하다보니 부모님은 반(半) 의료인이 되셨다. 집에서 재택치료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보호자의 역할이었다. 의료진이 없기 때문에 항상 환자의 상태를 주시해야한다. 환자는 몸에 힘이 없고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중심을 잃어 넘어질 수도 있고, 감염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므로 보호자는 내가 의료진의 역할을 한다 생각하고 환자를 잘 케어해야한다. 우리 부모님은 열과 성을 다해 나를 케어해주셨고 집에 있는 동안 감염되거나 다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건강해질 수 있었다. 

* * *

 한 달 동안 집에 있으면서 주기적으로 B병원에 가서 혈액검사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는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을 몸에 쐼으로서 치료하는 방식이라 아픈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치료 후에는 피곤함을 느끼는 부작용을 겪었다.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며칠이 지나면 그 피곤함도 사라졌다. 혈액검사는 백혈구, 호중구, 혈소판 등의 혈액 수치를 검사하는 것인데 검사 후에 담당 의사 선생님한테 진료를 받았다. 다행히 혈액수치는 정상이었다. 그런데 퇴원하고 첫 외래진료 때, 담당 의사가 내가 퇴원한 줄 모르고 퇴원했었냐고 물어봐서 어이가 없었다. 

‘이러다 내가 죽어도 모르는 거 아니야?’하는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B병원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병원 중 하나라서 그만큼 환자가 엄청 많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말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내 담당 의사도 환자가 너무 많아서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결과만 간단히 말해주었고 진료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았다.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환자들은 진료실에 기계적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궁금한 게 있어서 뭐라도 물어보려고 하면 바쁘니까 밖에 있는 간호사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쫓겨나듯이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내 뒤로 많은 환자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환자를 받는 병원 시스템의 문제인가 아니면 의사 개인의 문제인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대형병원도 가보았는데 이 정도로 정신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의사에게 있어서 환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기가 살려야 할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작업해야할 한 건의 업무였을까.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분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 글에 담지 못한 이야기와 정보는 인스타그램에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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