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흥미진진한 이유는 좋은 일이 나쁘게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좋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흥미진진'이란 단어는 모든 것이 마지막에는 좋게 끝날 때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집에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한 후 2차 항암치료(공고)를 받기 위해 다시 B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퇴원하기 전과 똑같은 병원이었지만 상황이 좀 달라져 있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한 달 뒤에 미국 연수를 떠나게 되었는데 일 년이 넘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그의 후임이 나를 맡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후임 의사는 공중보건의를 마친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전임에 비해 경력이 좀 부족해보였다. 치료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 했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나를 담당했던 의사가 바뀐다니 환자로서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환자에게 일 년이란 그 사이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 시간이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아버지께서 나 몰래 백혈병 세미나에 참석하셨는데 내가 치료받은 차트를 몇몇 의사선생님들한테 보여드렸더니, ‘치료 잘 받고 계시네요’라는 긍정의 반응이 아니라 무언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고 하셨다. 부모님께서는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으셨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B병원에서 공고치료를 마치고 C병원으로 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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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병원 또한 빅5 안에 드는 유명한 병원이었다. C병원의 종양내과에 가서 여러 검사를 받고 림프종 담당 의사선생님한테 진료를 보았는데, 내가 림프종이 아니라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 혈액내과 교수님이 나를 맡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가족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까지 림프종으로 알고 있었는데 백혈병이었다니. 물론 림프종과 백혈병이 혈액암의 범주 안에 있지만, 치료방법에 있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존재했다. B병원의 담당 의사가 미국 연수를 가서, 내가 병원을 옮기게 되었고, 그제서야 내가 걸린 진짜 병을 알게 되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헷갈렸다. 이런 일을 전화위복이라고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운이 좀 따랐던 것 같다.
병원을 옮기는 것은 정말 큰 모험이었다. 혹시라도 병원을 옮겼는데 상태가 안 좋아진다면 정말 낭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현재 회사가 별로 마음에 안 들거나 더 좋은 연봉과 복지를 제공하는 회사를 찾아 이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듯이, 우리 부모님께서는 기존에 입원해있던 병원 치료에 안주하지 않고, 내가 더 나은 환경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계속 노력하셨다. 보호자로서 단순히 환자를 케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미나에 참석하시고, 혈액암 협회나 환우회 카페에 조언을 구했으며 정보를 모으셨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과감한 전원의 결단을 내리셨다. 내가 만약에 우리 부모님 입장이었다면 다른 병원으로 쉽게 옮기지 못했을 것 같다. 평소에 신중하고 느릿하게 고민하는 우리 부모님이, 그 순간에 천사의 도움을 받으셨는지 아니면 아들이 죽음 앞에 선 모습을 보고 초인적인 결단력이 생기신건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우리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렇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현명하고 빠른 결단을 내리신 우리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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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을 포함한 암은 현대의학이 많이 발전했다고 해도 여전히 사망률도 높고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의료진을 믿는 것은 중요하다. 나도 병원을 몇 번이나 옮겼지만 의사, 간호사 선생님의 치료를 절대적으로 믿고 잘 따랐다. 환자는 의료진을 신뢰해야한다. 환자는 치료받는 것도 힘들어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오직 나의 건강에만 집중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호자의 역할은 좀 다른 것 같다. 보호자는 환자의 옆에서 환자를 케어하며, 치료가 지지부진하거나 어떤 걸림돌이 생긴다면 발 빠르게 대안을 찾을 수 있어야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걸린 병에 대해 많이 알 필요가 있다. 물론 환자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돌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보호자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환자를 포함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 가족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B병원에서 C병원으로 옮겼다. B병원에서 1차 항암치료를 받아 관해가 잘 되었고, 2차 항암치료(1차 공고)까지 잘 받은 상태였다. 이런저런 힘든 검사를 어렵게 받고, 머리를 빡빡 민 아픈 기억이 있는 B병원. 그래도 B병원 의료진의 수고와 그 봄날의 바람에 날리던 꽃향기는 잊지 못할 것 같다. 8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C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