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라는 프랑스 영화를 재밌게 보았는데, 프랑스어를 하는 배우들이 멋있어 보였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의 억양과 발음은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를 보며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병실 안에서 배우게 될 줄은 몰랐다. 무균실 안에서 주로 생활해야하는 백혈병 환자에게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공부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책을 찾은 다음 집으로 주문했고, 어머니가 그것을 소독한 후 병원에서 건네주셨다. A(아), B(베), C(쎄), D(데), E(으)...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울 때처럼 흥미로웠다. 국어와 다르게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따로 있는 것이 신기했고, 영어나 일본어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었고, 잠시나마 내가 아프다는 괴로운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프랑스어를 오래 공부하지 않았고, 지금은 한 지도 오래되어 거의 잊어버렸지만, 당시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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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한 것은 버킷리스트 작성이었다.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아니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정리한 목록이다. 노트에다가 퇴원을 하면 무엇을 꼭 해볼까 적어보았다. 배낭여행 가기, 봉사활동 하기, 대학가요제 참가하기,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여자애 찾기 등등...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는데 실행에 옮긴 것도 있고, 하지 못한 것도 있다. 우선 배낭여행과 고등학생 때 좋아한 여자애는 못 찾아갔다. 배낭여행을 못 간 이유는 퇴원하고 나서 체력이 떨어졌고 회복한 후에는 취업준비 하랴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이나 가족과 국내나 해외로 여행 다니며 재밌게 놀았다. 첫사랑을 만나지도 못했다.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되어 막상 만나면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노래 가사처럼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하지만 봉사활동도 하고 대학가요제도 참가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1년 넘게 봉사활동을 했고, 대학가요제에 팀원을 모아 참가했다. 티브이에는 나오지 못했고, 예선을 통과해서 MBC방송국 문턱까지 간 것에 만족했다.
버킷리스트를 쓰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큰 힘이 되었다. 아픈 치료를 받다보면 이렇게 힘든 치료를 받으면서까지 살아야하나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버킷리스트를 쓰면서 인생에 이렇게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을 느꼈고 삶에 대한 회복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또한 ‘나중에 꼭 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버킷리스트에 적으며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요즘도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실천하는 편이다. 작년에는 BTS가 멋져보여서 30대 중반의 나이에 댄스학원에서 춤을 배운 적도 있다. 클래스의 초등학생, 중학생 수강생들이 몸치인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열심히 배웠다.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미루다보면 영영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여행도 자주 가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버킷리스트를 쓰며 또 좋았던 점은 바로 상상력이 풍부해진다는 것이었다. 좁은 병실에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생각의 폭이 좁아지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예민해지고 우울해진다. 버킷리스트를 쓰며 제주도의 푸른 바닷가와, 맛집에서 파는 맛있는 파스타를 떠올렸다. 몸은 비록 병원 침대 위에 있었지만 정신은 이 세상을 훨훨 날아다녔다.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살고 싶다는 감정이 드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고, 꿈꾸던 여행지와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다니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 버킷리스트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힘 덕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