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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준 Sep 29. 2022

31. 간호사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

 부모님과 여동생이 이식 후보자였는데, 담당 선생님께서 공여자의 나이가 건강이나 회복을 고려했을 때 젊은 편이 좋다고 했다. 여동생은 나와 네 살 터울로, 어릴 적에는 여느 남매처럼 자주 싸우거나 무관심한 관계였다. 하지만 둘 다 이십 대가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여동생은 반일치 조혈모세포 이식의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이식을 결정해주었다. 오빠로서 여린 여동생이 병원에서 고생을 하는 게 많이 미안했다. 아무리 가족이라 그래도 자기의 피를 뽑아서 주는 것이 쉽지 않은 무서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동생에게 지금도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 

 외래 진료를 보고 한 달이 지나서야 D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각오였다. 어쩌면 집에 다시 못 돌아갈지도 몰랐다. 옷가지 등의 필요한 물건과 책, 휴대용 게임기도 챙겼다. 제한된 생활을 하는 무균실 안에서의 생활은 지루할 수도 있으니까. 

 입원한 곳은 조혈모세포이식을 위한 1인실이었다. 원룸 크기의 방 안에 침대, 맞은 편 벽에는 티브이가 걸려있었고, 문 옆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오른쪽을 쳐다보면 커다란 유리 통창이 있었다. 밖으로 높은 하늘과 병원의 차가운 무채색 벽이 보였다. 이곳에는 보호자도, 다른 환자도 들어오지 못하고, 오직 의료진만 이 격리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고독한 몸으로 마지막 산봉우리를 넘어야했다.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이 방을 나갈 수 있길 바랐다. 

* * *

 이식 전 처치를 위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몸 안의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모든 적혈구와 백혈구까지 소멸시키는 작업이다. 그 전 병원에서의 치료가 핵폭탄 급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보다 더 센 원자폭탄 급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며칠에는 이미 치료를 여러 번 받아서 그런지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몸이 무거운 것도, 속이 미식거리는 것도 예전에 겪은 일이라 익숙했다. 마지막 치료는 무난하게 넘어갈 것 같아 마음이 좀 편해졌다.  

 1인실이었지만 담당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들이 모두 친절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불편하거나 아픈 게 있는지 항상 체크해주셔서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병원을 여러 번 옮기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간호사 분들이 고생을 정말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의사도 환자 진료보랴, 치료하랴, 연구하랴 바쁘겠지만, 병동 일선에서 환자와 일차적으로 부딪히는 의료진은 바로 간호사였다. 간호사가 쉽지 않은 직업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사명감 없이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아프고 절망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하다. 우리 부모님도 혹시 감염이라도 될까 병실 위생이나 채혈 등 여러 치료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실제로 약물을 잘못 투여해서 환자가 잘못되었다는 기사를 뉴스에서 가끔 본다. 베테랑 의료진들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보호자는 면밀하게 환자를 케어하고, 그러다보면 간호사를 부를 일이 많이 있다. 간호사는 환자도 신경써야하고, 때때로 보호자에게 까다로운 요구도 받는다. 또한 밤에는 잠도 못자고 스테이션에서 환자의 차트를 보고 정해진 시간에 링거도 교체하고 할 일이 많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항상 집중해서 일을 하고, 실수를 하면 선배 간호사한테 크게 혼이 난다. 병원생활을 하며 간호사 선생님들의 그런 애환을 두 눈으로 보았다. 지금은 간호사라는 직업이 소방관처럼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숭고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들 감사한 분들이지만 마지막 이식을 했던 D병원의 격리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중요한 조혈모세포이식을 했던 병동이기도 하지만, 1인 격리실이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했고 독한 약물로 정신을 못 차릴 때 성심성의껏 나를 돌봐 주셨다. 고독한 싸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아니었다. 그분들은 내 편에 선 백의의 천사이자 나이팅게일이었다. 


* 글에 담지 못한 이야기와 정보는 인스타그램에 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instagram.com/ihave.to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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