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며칠이 겨우 지났다. 다행히 나는 살아있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렸고, 혈액수치도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식을 한 다음 주에 생일이 있어서 가족이 면회를 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가족은 내 안부를 물었다. 비록 생일 케이크와 선물은 없었지만, 여동생도 얼굴이 좋아보였고 우리 가족은 큰 고비를 넘겨 안심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무균실에서 나와, 이식을 한 환자들이 머물 수 있는 병동으로 옮겼다. 무균실 병동에서 케어해준 간호사 선생님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지금도 그곳의 의료진들은 생사의 문턱에 서 있는 환자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생하고 계실 것이다. 살다보면 감사한 일, 감사한 사람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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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할 수 있는 백혈병 치료는 전부 마쳤다. D병원에 입원한 지 3주 정도 지난 후 집으로 퇴원했다. 이제는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잘 먹고, 집에서 몸을 잘 관리하여 건강한 상태로 계속 나아가야 했다. 아팠던 것도 추억이라고 정든 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이었다. 병원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당분간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피검사를 해야 했다.
집에 가서 아프기 전에 산 하얀색 나이키 신발을 들어보니, 오랫동안 신지 않아서 밑창이 누렇게 굳어있었다. 얼마 신지도 않은 신발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이 버렸다. 엄마는 부엌에서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셨고, 식사 후 우리 가족은 여느 때처럼 거실에 모여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잠 잘 시간이 되었고 나는 정돈된 침대에 누웠다.
8개월의 힘들었던 시간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A병원에서 D병원까지 병원을 세 번이나 옮기는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 간호사,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이 있었다. 마치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자 고민이 많이 되었다.
체력이 이렇게 떨어졌는데 어떡하지.
복학은 언제 하지.
취업은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완치는 될 수 있을까.
가슴이 무거웠다. 민머리를 손으로 치며 일단 치료와 회복에 전념하기로 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아직 완치된 환자가 아니었다. 동생의 조혈모세포가 부작용 없이 몸에 잘 생착해야 한다. 현재에 다시 감사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갈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