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화신 Jan 19. 2020

글이 안 써져도 끝까지 쓰는 무모함의 미덕







글이 잘 안 써질 때, go? stop?


시공간을 초월한 이 고전적 선택지 앞에서 우린 억지로라도 마저 써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할지 아니면 당장에 멈추고 다른 일을 찾아 나서야 할지 고민한다. 셰익스피어도, 버지니아 울프도, 피츠 제럴드도 이런 갈등을 한 적 있을 테지.


우린 심각한 햄릿이 되어 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꽤 근사한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는 척)한 다음에, 결국 이미 자신이 마련해놓은 정답으로 손을 뻗는다. 쓰느냐 마느냐라는 생각 자체가,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는 적극적인 아우성이란 걸 본인만 모를 뿐이다.


나는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답답한 모범생이 아니야, 나는 쓸데없는 고집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 따위 하지 않아. 이런 현명해 보이는 이유들이 '안 쓴다'를 고른 우릴 안심시킨다. 미련하지 않은 자신의 처신에 흡족한 마음도 든다. 잠깐만. 내가 '안 쓴다'를 고른 자들을 흉보려고 이 글을 쓴 것 같은 기운을 느끼셨다면 부정하는 바다. 나 역시 안 써져서 안 쓸 때도 있었으니까.


한쪽을 비난하는 대신 다른 한쪽을 옹호하는 태도로 말하건대, 글이 잘 안 써질 때 억지로 쓰는 미련함은 얼마나 멋진 자세인가! 나는 미련함을 싫어하지 않는다. 햄릿보다 돈키호테에 더 끌리는 건, 아마도 돈키호테의 터무니없고 곧이곧대로인 행동들에서 삶을 대하는 정직하고 용감한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였다면 쓰기 싫어도 끝까지 썼을 것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이렇게 상상하는 이유는 고난을 피하고자 잔꾀를 찾아내는 일도, 타당하고 논리적인 근거를 창조하여 글의 중단을 변호하는 일도 그에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최대 매력은, 그 미련함에 있다.


이 양반은 당최 몸을 사리지 않는다. 기사도 정신에 입각, 고난은 본인 같은 기사에게 마땅한 동반자라고 여기고서 기꺼이 어려움과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크게 다친다. 다시 말하건대 이런 미련곰탱함이 그의 상당한 강점이자 남들에겐 없는 인간성이다.


햄릿보다 미련하고 멍청한 그에게 조금 더 끌리는 개인 취향에 따라, 나는 글이 잘 안 써질 때도 끝까지 쓰는 쪽이다. 이건 나의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발현이라며 우쭐대고 싶지만, 이미 돈키호테를 예로 들면서 이런 포장하기는 접었다. 나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으로 글을 쓴다. 응당 기사다운 기사라면 아가씨를 위해 이 한 몸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아니 오히려 그것이 나의 명예이자 기쁨이라 외치는 돈키호테처럼, 응당 글 쓰는 사람이라면 글이 잘 안 써져 괴로워도 이 고통이야말로 작가의 명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큭.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창작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즐긴다? 대단한 작가 납셨네. 이런 소곤거림에도 나는 반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글을 쓸 때 그런 마음으로 쓰는 건 사실이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기사도적 자질이 한참 부족한 돈키호테가 스스로를 용감하다고 믿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고난 속으로 뛰어들듯이, 나도 그런 꼴이다. 마치 진지한(?) 작가가 된 것처럼 믿고 자신을 부추기며 '글이 잘 안 써지는 고난'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무모함이란 얼마나 숭고한 인간의 본성인가!


작가를 작가이게 하는 건 '창작의 고통'이라는 내 맘대로의 돈키호테적 발상에 따라, 나는 글이 안 써지는 괴로움을 당연하게 여겨 받아들이는데 이런 생각이 글을 끝까지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백지 앞에서 멍 때리는 시간마저도 글쓰기의 과정이라며. 제인 오스틴도, 밀란 쿤데라도, 오스카 와일드도 느꼈을 고통을 나도 지금 느끼고 있다며!


걸리버가, 톰 소여가, 돈키호테가, 허클베리 핀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모험을 하고 있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글쓰기는 매번 모험으로 다가온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날씨가 변덕을 부려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웬 두꺼비처럼 생겨먹은 괴물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쓴다. 모험이란 중간에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기꺼운 고난을 지나 글이 완성될 쯤 내 얼굴은 조금 더 작가적 뉘앙스를 띨 거라고 생각하는 건 멍청하지만 뿌듯한 일이다.




 

이전 03화 쓰는 만큼 존재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