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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4. 2021

13. 탈모 샴푸와 웃음의 역학

대머리는 왜 웃긴가?

원래 쓰던 샴푸가 다 떨어져서 새로운 샴푸를 꺼냈다. 선물용으로 받은 것 중에는 탈모 샴푸밖에 없었다. 탈모가 없는 사람이 탈모 샴푸를 써도 되나 싶었지만, 안 쓸 건 또 뭔가 싶었다. 탈모 샴푸에 효과가 있었다면 이 세상에 탈모인은 없었을 거다. 탈모가 완벽히 치료 됐다는 소식은 아직 들은 적 없다. 탈모를 방어한 탈모 샴푸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탈모 샴푸가 다른 샴푸와 다를 거란 보장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탈모 샴푸를 쓴다고 머리가 괜히 더 빽빽해질 일을 없을 거란 결론을 내리고, 오늘 탈모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대머리.' 어딘가 으스스한 단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대머리'란 말 대신 '머머리'를 사용하나 보다. 내가 알기로 세상 사람 중 1/3 이상은 탈모를 겪는다. 탈모가 꽤 흔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2021년이 될 때까지 세상은 탈모를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탈모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는 보통의 사람을 상상할 때 머리가 있는 모습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탈모는 표준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하자가 된다.

밥을 먹다가 대머리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머리가 유난히 가는 남자에게서 토론은 시작됐다. 남자는 뜬끔없이 대머리로 농담할 수 있는 세상이 차별 없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상적인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대머리로 농담을 해야 한다고도 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남자를 제외하곤 모두 반대했다. 우리는 대머리에 대한 농담은 잔인하다고 말했다. 남자는 잔인할 수록 더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반대했지만, 남자의 말에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었다. 장애인에 대해 농담할 수 있는 세상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세상이라는 어떤 장애인 지식인의 말이 생각났다. 이 말에는 농담의 위계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나는 때때로 웃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목격했다. 웃음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대학 강의실에서는 웃음이 자주 흘러나왔다. 교수님이 농담을 던지면 학생들은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이 아무리 재미없는 농담이어도. 학생들이 웃는 역학은 간단하다. 우리는 웃음의 작용 방식을 몸으로 익혀 왔다. 웃음 포인트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학생들은 교수가 스스로 농담이라고 가정한 말을 내뱉으면 그에 따라 웃어줬다. 부장님의 재미 없는 농담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웃음에는 위계가 있다. 힘이 있는 자는 힘이 없는 자들에게 웃음을 강요할 수 있다. 그래서 웃음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여기까지 웃음의 실증적 위계다.

관념적으로 웃음의 역학을 따져 보자. 웃음 코드라 불리는 것들을 분류해 보면 답이 나온다. 웃음은 이분법적 체계를 전제로 작용한다. 상위에 위치한 관념이 하위로 하락할 때  또는 하위에 위차한 관념이 갑자기 상위로 치고 들어올 때, 위치 에너지는 운동 에너지로 바뀐다. 관념 세계의 이 운동 에너지는 현실에서 웃음으로 터져 나온다. 신체 부위에서 생각을 하는 뇌는 상위 계층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보통 뇌를 포함한 얼굴은 보통 신성하게 여겨진다. 반대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신체 부위는 똥구멍인 항문이다. 똥구명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똥구멍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머리가 나쁜 사람을 말할 때 '머리에 똥만 들었냐'는 표현을 사용한다. 상대가 멍청한 행동을 할 때 '머리에 똥만 찼네'라고 말하면 웃음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신성과 더러움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스탈린 아들은 똥 때문에 죽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세계2차대전 당시 스탈린은 신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스탈린 아들은  신의 아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죽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비웃음으로 기억될 역대 사건 중 하나가 틀림없다. 여기서도 웃음 포인트는 신성과 더러움의 만남이다. 똥 얘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더러운 것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다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때 거대한 똥을 본 적이 있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아이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누가 똥을 쌌는데 너무 크고 무거워서 아무리 물을 내려도 안 내려간다고 했다. 그 똥은 남자 팔뚝만할 정도로 컸다. 친구들과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후일담으로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똥을 자르니 한 덩어리씩 내려갔다고 한다. 똥의 침범이 우리를 그렇게도 웃게 만들었다.

과거에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은 웃음을 만들어 냈다. 요즘은 정치적 올바름이니 뭐니 해서 장애인 비하에 대해 정색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런 용어들로 많이 웃었더랬다. 말길을 잘 못 알아들으면 우리는 '귀 먹었냐고' 놀렸다. '귀머거리'냐고 묻는 것이다. 키가 작으면 난쟁이라고 놀렸다. 더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그 뒤에 똥자루를 붙여 '난쟁이 똥자루'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똥쟁이', 이 치욕스러운 말은 웃음을 자아내기 가장 손쉬운 용어였다. 학창시절 학교에서 똥을 싸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바지에 싸는 게 아니라 화장실에 싸는 것도 그랬다. 장난기가 심한 애들은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화장실에 갔다 온 아이를 추궁했다. 똥 사고 온 거 맞지? 그깟 똥이 뭐라고, 볼 일을 보고 온 아이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하위의 개념들은 신성한 우리의 일상에서 놀림거리였다.


대머리는 왜 웃길까? 대머리도 똥 같은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인가? 나는 대머리 아저씨를 보고 웃음을 참아야 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대머리를 상징하는 모습 중에는 1:9 가르마가 있다. 가운데 머리가 없으니 그나마 밑에라도 있는 머리를 길러 가운데로 올린 것이 1:9 가르마다. 나는 이 이상한 가르마를 보면 차라리 머리를 미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대머리인 거 다 아는데.(잔인한 생각이 맞다.) 가운데 머리를 가리기 위해선 옆머리를 적어도 어깨까진 길러야 할 것이다. 그 모습이 더 이상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나는 1:9 가르마의 실상을 마주했다. 가운데 머리에 곱게 빗어 올린 옆머리가 바람이 불자 45도 각도로 섰다. 아저씨의 빈 머리가 그대로 노출되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을 연출했다.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지만, 내 뒤에 오던 아줌마는 무방비한 상태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줌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일상적이지 못한 기이한 모습이 웃음을 불러온 것이다.

나는 여전히 대머리를 농담거리로 삼아야 한다는 남자의 말에는 반대한다. 선후 관계가 잘못 됐기 때문이다. 대머리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 들여서 대머리로 농담하는 것과, 대머리로 농담하는 것이 여전히 상처가 되는 세상에서 대머리로 농담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대머리로 농담하기 전에 대머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대머리에 대한 농담은 대머리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헤어스타일에 대한 위계 질서에서 대머리는 최하위층에 위치하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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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은 까볼 때까지 모른다(면까몰)지만, 사람들은 면저 결과를 예측하기 위해 부단히도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나온 속설 중 하나가 면접관을 웃기면 붙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면접관을 웃길 수 있는 센스와 패기라면 붙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웃음의 위계질서를 안다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면접장에 가면 면접관들을 쉽게 웃겼다. 웃기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웃기지 않는 게 힘들다. 머리를 조아리고 스스로를 낮추면 웃음은 금방 흘러 나온다. 내가 철저히 밑에 있음을 보여주는 제스처를 취한다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은 자연히 내게로 흘러들어 왔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진함'을 가장한 '멍청함'을 내보이면 된다. 그런데 이게 나를 유용한 사람이라고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쓸모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노동시장 최하위층에 위치한 취준생에겐 웃음이 가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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