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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5. 2021

14.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못난 내가 아름다움을 논해본다

'아름다움'은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 단어다. '아름다움'이란 단어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다. 그래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기웃거리다가 발견한 책도 은희경 작가의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였던 것 같다.

소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주제의식은 제목 그대로다. 주인공은 아름다움을 어떤 권력으로 느끼고 아름다움 앞에 잔뜩 움츠려 들어 있는 인물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  콤플렉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생애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그것도 단기간에, 가학적으로. 아버지와의 마지막 조우를 당당한 모습으로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주인공이 아버지와 아름다움과 권력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이야기 처음에 나온다. 어렸을 때 주인공은 아버지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주인공은 부모님이 이혼한 후로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했다.) 꽤 고급스러운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그래서 거북한) 음식을 먹었는데, 주인공이 마주한 아버지 뒤에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자리하고 있다.  비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영어 식 이름이다. 미의 여신과 겹치는 아버지 앞에서 주인공은 잔뜩 움츠려 든다. 그리고 괜한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해석하기엔 그렇다. 주인공이 움츠려 든 이유는 비너스 때문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만 같은 데서 오는 두려움에 주인공은 잔뜩 움츠려 든 것이다. 그러나 순간의 광경은 주인공의 인식을 속인다. 주인공은 아버지 앞에서 쭈뼛쭈뼛했던 순간을 미의 여신 앞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못난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실망했을 거라고 믿게 된다. 이 장면을 해석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은희경 작가가 아버지와 '비너스의 탄생'을 괜히 겹쳐 놓은 것이 아니라고 (괜한) 확신이 든다. 나는 이 장면이 아름다움 앞에 쉽게 움츠려 드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앞에 쉽게 겁을 먹는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도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미리 눈치채고는 아름다움을 미워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미움을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에게 온 것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고 느낀다. 아름다움 그게 뭐라고!



아름다움, 그건 '뭐'다. 확실히 아름다움엔 뭔가가 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는 아름다움을 목격한 순간들에 대한 글을 남겼다.(그 순간이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미녀>다. 민음사 체호프 단편선에서 발견한 소설인데,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살면서 딱 2번 미녀를 목격했다. 만났다는 표현보다 목격했다는 표현이 적합한 이유는 진짜 스치듯이 봤기 때문이다. 각각 5분이 채 안 된다. 첫 번째는 10대 소년 시절에 만난 아르메니아 소녀다. 화자는 그 소녀를 본 순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휘익 바람이 불어오더니 권태며 먼지와 같은 오늘 하루 동안의 지꺼기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현실은 물론 꿈속에서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인물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내 앞에는 '미녀'가 서 있었다. 번개를 한번 보면 알듯 나는 그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자는 홀린 듯 소녀를 감상한다. 처음에는 감미로움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어떤 묘한, 행복하면서도 오만한 분위기"가 자신과 소녀 사이를 차단하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나중에는 이 묘한 느낌을 슬픔이라고 명명한다.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두 번째는 20대 청년이 되고 난 뒤 잠시 정차한 기차역에서다. 플랫폼에서 어슬렁거리던 화자는 사람들이 한 곳만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자는 옆에 서있던 장교에게 이유를 묻다가, 사람들이 보는 곳을 보고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음을 느낀다. 저편에 미녀가 서있었다. 이번엔 이렇게 묘사한다.

"머리카락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뭔가 어긋나 있거나 아니면 극히 평범했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는 진정한 미녀의 인상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를 보면서 러시아적인 얼굴이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벽한 외모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되자 승객들은 다시 기차에 올라탄다. 그러나 다들 우울한 표정이다. 화자는 곱슬머리의 못생긴 남자의 표정을 보고 그가 미녀와 사랑에 빠졌음을 눈치챈다. 그 모습을 "소화불량인 듯한 얼굴은 감동과 함께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아가씨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치 온몸으로 인정하고 느끼는 듯" 슬픈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름다움은 처음에는 감동과 경탄과 즐거움을 주다가, 나중에 가서는 꼭 우울과 슬픔과 한탄을 준다. 나는 <미녀>를 보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 그것은 품고 싶지만, 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아름다움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내 곁에 있더라도 언제든지 금방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존재는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찰나에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의 곁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듯이 말이다.

아름다움에 빠져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어둠 속의 웃음소리>만 해도 어린 애인에 눈이 먼 남자 이야기다. 남자는 옆모습만 예쁜 아내와 귀여운 딸을 버리고 어린 애인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 그러나 사랑을 되돌려 받진 못한다. 어린 애인에겐 정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나서도 남자는 어린 애인을 보내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서 이런 찬란한 아름다움은 다신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그것엔 어떤 절대적인  힘이 있다. 그러나 내것은 아니기에, 나를 힘들게 한다.



얼마 전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하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면접을 보러 가는데, 그날 이상하게 급했다. 검은색 정장에 흰색 폴라티를 챙겨 입고 나왔는데, 밖에 나와 화장실 거울을 보니 흰색 폴라티가 아니라 흰색 히트텍이었다. 그냥 히트텍이었으면 상관이 없었을 텐데, 목이 쭈글쭈글한 히트텍이었다. 엄마 말로는 세탁기가 마음대로 삶음 세탁을 하고 있었단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한마디로 추레했다.

사장실에 도착했는데, 비서가 눈에 띄었다. 키가 호리호리하고 피부가 유난히 하얬다. 큰 키에 입은 롱스커트와 그 위에 받쳐 입은 얇은 니트 카디건이 가는 몸 선을 드러냈다. 체호프의 말 마따라 '미녀'였다. 비서에게 안내받아 들어간 사장실은 크고 웅장했다. 붉은색과 어두운 갈색이 섞여 있는 색채가 위엄 있게 느껴졌다. 기다란 탁자 끝에 사장이 앉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마스크를 벗으라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마스크의 입김 때문에 화장은 지워지고 없었다. 마스크라는 안전막에 나태하게 화장한 탓도 있었다. 민낯을 꺼내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사장의 반듯하게 멋 부린 포마드 앞에 한없이 못생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면접 중간에 많이 버벅거렸더랬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히트텍이 생각났다. 창피했던 것 같다. 사장실 문밖에는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표를 달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떼서 줬다. 비서는 (당연하지만) 무표정이었다. 나는 어떤 슬픔을, 약간은 비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면접이 끝나고 설렁탕을 사 먹으면서, 구두를 신은 발이 아파서 앞의 의자에 올려놓았다. 아름다움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 추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왜 우리에게 잔인할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왜 아름다움을  잔인하다고 느낄까? 원래 진실을 알기 위해선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을 모두 들어보는 게 맞다. 그러니 아름다움의 입장도 들어보는 게 맞다. 쉽진 않겠지만.

다행히도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아름다움의 입장을 들려준다. 돈키호테는 모험 중에 '여자 목동 마르셀라 이야기'에 대해 듣게 된다. 동네에서 엄청 잘생기고 똑똑한 남자는 미의 화신 마르셀라의 사랑을 얻지 못해 절망한 채로 자살했다. 남자의 친구는 말한다. "그는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증오를 받았고, 존경했지만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걸 보면 아름다움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참 일관된 것 같다. 돈키호테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끌려 남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한다. 그곳에 모인 남정네들은 마르셀라를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라고 뒷담화한다. 그때 저 멀리 바위 꼭대기에서 소문을 능가하는 엄청난 미인이 등장한다. 미의 화신은 말한다.

"저는 저 때문에 온 겁니다. 그리소스토모(남자)의 죽음과 그의 고뇌가 모두 제 탓이라고 하시는 말씀들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지를 이해시켜로 온 겁니다. (중략) 하지만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가 못날 수도 있고, 못난 것은 싫은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네가 미인이라서 너를 좋아한다. 나는 비록 못생겼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아, 잔인하다. 너 혼자 좋아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라니! 그리고 마르셀라는 말한다. "그분은 제가 분명히 거절했는데도 단념하지 않으셨고, 제가 증오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절망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했으니 아름다움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혼자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에 슬퍼해왔다. 아름다움은 무관심의 화신이기에 우리가 더 절절히 맬 수밖에 없던 게 아닐까?

세르반테스는 이 에피소드에서 굳이 돈키호테가 남자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한 대화를 적었다. 동행인 한 남자는 돈키호테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가 미친 것을 확신하고는 묻는다. '편력 기사들은 왜 대결하기 직전에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의 연인들에게 가호를 비느냐고.' 이에 대해 돈키호테는 "사랑하는 귀부인이 없는 기사는 있을 수 없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늘에 별이 있는 것과 같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사랑 없는 편력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사랑하는 일은  장범준의 '노래방에서'처럼 '사랑 때문에 노랠 연습하는 건 자연의 이치'이듯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가 동경하는 '아름다움(들)이 나를 멸시한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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