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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5. 2021

16. 정체성(1)

우리는 왜 자꾸 거울을 봤을까?

학창시절 우리는 끊임없이 거울로 내 모습을 확인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뒤편에 놓인 거울로 모여들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거울을 봤다. 거울을 통해 상대방을 보며 이야기했다. 남자, 여자 구분은 없이 우리는 앞머리에 집착했다. 남자아이들은 손으로 앞머리를 끊임없이 45 각도로 쓸어 넘겼다. 여자아이들은 일자 앞머리를 선호했다. 하교할 때가 되면 머리가 떡져있었다.

여자만 모여있던 고등학교 교실의 풍경도 기억난다. 각자의 책상에는 탁상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연필꽂이에는 손거울이 꽂혀 있었다. 교실을 떠날 때를 대비한 접이식 작은 손거울은 주머니 필수 아이템이었다. 한번은 담임이 말했다. "거울 좀 그만 봐! 그러면 너희 못생긴 얼굴이 달라질 것 같니?" 장난인 걸 알아서 우리는 크게 웃어 넘겼다. 우리도 알고 있었다. 거울을 본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다만, 그럼에도, 그래도, 거울을 포기하지 못했다. 왜?

내가 봤을 때는 정체성 때문이다. '거울보기'는 정체성을 부여 잡기 위한 우리의 몸짓이다.

내가 관찰한 바를 적어보겠다. 주변 친구들이 외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2-13살 때부터였다. 엄마들은 이걸 사춘기라고 불렀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먼저 자기 사춘기인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까지도 사춘기가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 사춘기가 오면 예민해진다는데, 나는 원래 예민한 사람이었다. 짜증이 많아진다는데, 나는 원래 짜증이 많았다. 엄마에게 반항한다는데, 10대 이전부터 반항했다. 이것들은 사춘기의 증상일 뿐이다. 증상 이전의 원인을 아는 것이 진짜 사춘기를 아는 것이다. 진짜로 사춘기를 알고 싶다면 '시선'을 생각해야 한다.

신체적 2차 성징은 진작에 겪었지만, 마음의 2차 성징을 경험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세상에 나를 보는 '시선'들이 늘어났다. 그때부터 (무심한 난데도 불구하고) 외모에 신경쓰기 시작했다.(이 부분을 구구절절 이야기하진 않겠다. '6. 표준의 삶'에서 너무 구구절절 쓰고 후회했다.) 아무튼, 외모 강박증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예측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 외모 강박증에서 벗어나고 실험대상을 보는 심리학자의 마음으로 나를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내 정체성을 부여잡기 위해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일치하기를 간절히도 바라면서 불안증에 시달렸던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내가 속한 세상이 넓어지면서 우리는 사춘기를 겪는다. 원래 나를 구성하던 세계에는 나와 내 가족뿐이었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말은 믿지 않기 때문에 형제자매를 예외로 하면) 나를 바라보는 태초의 시선은 나, 엄마, 아빠 세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의 시선은 일치한다. 자기 자식을 보고 못생겼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모의 눈에 꿀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챈다. 그러니까 태초 시선은 내 것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내 정체성 그 자체다. 가장 쉬운 예로, 나는 나를 예쁘게 봤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고 또래집단이 형성되면서 시선은 늘어난다. 나를 예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고, 못생겼다고 놀리는 사람도 있다. 이때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 교실에 아이들이 35명이라면, 나의 정체성은 1/35로 쪼개진다. 아, 나를 포함하면 1/36으로 쪼개진다. 안타깝게도 내 시선은 수많은 시선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춘기는 '시선'의 '쪼개짐'에서 발현된다. 내가 생각하던 내가 내가 아닌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스무 살 때 이런 순간을 맞이했던 것 같다. 대학이라는 좁은 사회였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넓어진 사회였다. 시선은 n개로 늘어났다. (여기부터는 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내가 봤을 때 사회로 나갈 수록 'n'은 무한대에 가까워진다. n이 무한대로 갈 때 1/n로 쪼개진 나의 정체성은 '0'에 수렴하게 된다. 내가 보는 나의 시선에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은데, 내가 보는 내가 어떻게 중요해질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에 의해 내 정체성이 흔들릴 때, 그래서 우리는 거울을 본다. '거울보기'는 잡을 수 없는 정체성을 붙잡기 위한 우리의 헛된 몸짓이다.

스스로 사소해졌다고 느낀 순간들을 되새겨 본다. 고3 때 수능이 끝나고 다이어트를 했다. 많이 뚱뚱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뻐보이고 싶은 나의 시선과 나를 예쁘게 보지 않는 수많은 시선들 때문에 혼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러던 시기에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버스를 타고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댔다. 겨울이라 패딩과 패딩 모자로 무장한 상태였다. 당연히 나는 청소년이었기에 단말기에 청소년 요금이 떴을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아줌마! 애들 요금 내면 어떡해?"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아저씨 얼굴을 쳐다봤다. 아저씨는 (그나마 다행히도) 내 앳된 얼굴을 보고는 잘못 봤다며 사과했다. 어쨌거나 내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추레하고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 봤을 때 아줌마 같다는 건 아직 스무살도 안 된 여자아이에게 가혹한 처사였다. 아, 사라져버리고 싶었던가?

세월이 흘러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읽고 이 치욕적인 순간을 떠올렸다. 마흔이 넘은 여자에게도 아줌마는 가혹한 일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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