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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 Jan 04. 2021

2. 500일의 썸머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독일 교환학생을 갔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시험은 학기 말에 한 번만 치면 됐고, 수강신청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출석체크도 없었다. 내가 들은 수업의 시험을 신청해서 치면 그걸로 수강한 것이 인정됐다. 그래서 나는 꽤 여유로웠다. 매일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미드를 봤다. 밤과 낮의 개념이 사라졌고, 수업 들으러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완전 자유시간이었다.(사실 이 마저도 자주 빠졌다.)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지내다 보니 권태가 왔다. 이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해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언젠가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딱히 할 일은 없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분석하기로 했다. 첫 번째 영화가 <500일의 썸머>였다. 좋아하는 영화에 속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냥 끌렸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를 좋아했지만 왜 좋아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분석해보고 싶었던 점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가장 단순무식한 법을 택했다. 대사 하나하나를 공책에 써가면서 (영어 공부도 겸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인상 깊은 장면은 그려가면서 구도를 분석했다. 사실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고, 그냥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만족했던 것 같다. ​

내가 <500일의 썸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처음 봤을 때나 여러번 봤을 때나 똑같다는 점에서 영화나 사람이나 첫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맨 앞 부분의 캐릭터 소개다. 캐릭터 설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한데, 썸머 보다는 남자 주인공에 대한 설명이 내 주의를 끌었다. 남자 주인공인 톰은 사랑에 있어서 순진한 부류에 속한다. 운명 같은 사랑을 믿는다. 운명의 대상이 톰에게 있어서는 썸머였던 것인데, 암튼 그런 믿음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가 운명 같은 사랑을 믿게 된 이유는 영화에서 정확히 말해준다. 그는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을 잘못 이해했다!

더스틴 호프만은 밀애를 즐기던 로빈슨 부인이 아닌 그의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로빈슨 부인의 딸을 결혼식장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으로 사랑에 있어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신부의 애인이 '사랑의 도피'를 하는 장면은 한 편의 그림 같다. 아름답다. 운명의 사랑이란 이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둘이 버스를 탔을 때, 그리고 맨 뒷 좌석에 앉았을 때, 둘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사랑의 도피가 준 환상적인 기분은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도피 후의 막막한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일푼에 아무 것도 없고 사랑만 있는, 그 사랑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함이 이 둘을 습격한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러나 톰은 이 표정을 보지 못했다. 톰이 기억하는 것은 '사랑의 도피'가 주는 환상뿐이다.

내가 <500일의 썸머> 남자 주인공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와 같은 잘못된 이해 또는 첫인상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에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소설이었다. 나는 원래 꾸준히 책을 읽는 부류에는 속하지 못했다. 책보다는 영화를 좋아했고, 그전까지 두꺼운 소설책은 거의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원래의 취미가 지겨워져서, 당시에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팟캐스트를 듣게 됐는데, '이동진의 빨간책방'과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이 그것이었다. 그러다 작가 김영하씨가 읽어주는 버드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듣게 됐다.

굉장히 늦은 밤에 잠이 안 와서 잠을 자기 위해 들은 것이었다. 솔직히 제목부터 재미없어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반대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작가가 읽어주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노트북에 받아 썼다. 삶의 지침서가 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러셀은 근면한 노동을 찬양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1920년대인 당시에도 모든 노동자가 하루에 4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먹고 살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인류의 발전은 노예를 부리며 게으르게 살아가는 귀족들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여유 속에서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철학과 사상과 과학이 나왔다는 얘기다.

나는 대학에 들어온 뒤 게으르게 살기로 결심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내 생각에는 과욕과 광기를 부려서,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고3 때 나는 나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과하게 노력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나는 허리 근육 대부분을 잃어버렸고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져 버렸다. 나름 괜찮은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 뿐이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허리 통증과 정신적 상처 말고는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맹목적인 노력과 스스로에게 부과한 의무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렇듯, 적어도 주변 환경 때문에라도, 그런 의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래서 굉장히 어정쩡한 위치에 서게 됐다. 노력하는 것도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애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게으른 생활을 하려고 했었다. 불안감에 시달리며.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게으를 궁리를 하던 나에게 엄청난 인생의 지침서가 됐다. 나는 여유로움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며 남은 대학생활을 했다. 소설 수업을 듣고, 영문학과에서 소설을 읽으며 진짜 제멋대로 보냈다. 당시 생활에 대해 후회하는 바는 없지만, 요즘에는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결과 현재의 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에 대부분의 사람의, 아마 90% 이상은 맥주를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허비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 10% 정도는 인류에 유익한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 나는 이 부분을 간과한 것 같다. 여유로운 것, 게으른 것, 그 시간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내가 90%가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 결과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 해 놓은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톰은 영화 '졸업'을 잘못 이해한 대가로 홍역을 치른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지고, 인생을 거의 포기한다. 적어도 몇 달은 그렇게 지낸다. 보통 바닥을 친 사람은 일어설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수십 번을 봤지만 그 역학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렇게 일어섰을 때 그는 어텀(Autumn)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 여자랑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나도 어쩌면 '게으름에 대한 예찬'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기회를 지금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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