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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29. 2023

발산리


     


         

 어슴푸레한 골목길로 일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전등불이 켜진다.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한 집 건너 만큼이다. 

 동네로 들어서는 길이 비좁아 간 길 되돌아 나와 큰길 가에 차를 세워두고 나서도 오가는 사람 어깨에 걸릴 것 같아 팔려가는 소를 바라보는 심정이 된다. 그 너른 들녘에선 거름 냄새가 풍겨 와도, 오래도록 쌓여 있어도 누구 하나 치우라고도 하지 않나 보다. 마을이 도시에 붙어 있는데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고향동네를 닮아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발산리.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과 과수원이 병풍처럼 에둘러 있다. 촘촘하게 지어진 집 사이로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외양간에는 젖소들로 넘쳐난다. 동네가 둥그렇게 터를 잡은 데다 골목길이 여럿이라 숨바꼭질하면 좋을 것 같다. 야트막한 담에서 고개를 쑥 빼 밀고 속삭이듯 말해도 친구가 금방 방에서 나올 것만 같다. 

 오롯이 서 있는 종탑도 인상적이다. 종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가슴도 푸근하고 따뜻하겠지.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시끄러워도 시끄럽지 않다. 시끄러운 것 같은 데도 조용한 게 시골이다. 

 늦은 시간에 들러 고생한다며 할머니가 대소쿠리에 있는 홍시를 건네고 옆집 아낙은 녹차를 덩그런 쟁반에 담아낸다. 며칠 전 왔을 때 인심 그대로다. 얼굴 안다고 곁에 붙어 참견하는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의 너털웃음도 보기 좋다. 자전거를 외로 끌며 절뚝거리는 아픔을 안고 있지만 오늘따라 그러한 기색도 없으시다. 

 어떤 할머니는 땅에 닿을 듯이 허리가 구부정하지만 내 집에 온 손님 문전박대하면 안 된다며 마당까지 나오신다. 낯선 나를 타향에서 돌아온 아들인양 반기며 할아버지가 암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떤 음식을 해주면 좋으냐며 별의별 것을 다 물으신다.  

 그래, 그게 고향이다. 사람 냄새나는 데가 고향이다. 어쩌다 간 나그네를 너나 할 것 없이 반기고, 다들 처음 보는데도 낯설어하지 않는 동네가 진짜 고향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입 다물지 않고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발산리가 다시 돌아갈 고향이다. 

 길이 비좁은 데다 초가지붕이 즐비하지만 발산리가 정겹다. 일터에서 돌아와 툇마루에 앉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땀 냄새마저 구수하다. 

 땅거미가 드리워진 처마 밑에선 저녁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이리저리 면모를 봐도 다들 넉넉해 보이지 않지만 저녁이 맛있게 익어간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 쓴 여인이 아궁이 앞에 앉아 있다. 부지깽이로 타지 않은 등걸을 뒤적이면 덩달아 내 얼굴은 홍시가 된다. 

 길에서는 쇠똥 냄새가 나고 주인의 옷에서는 젖소 냄새가 난다. 나도 그를 처음 보고 그도 나를 처음 보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긴다. 거무칙칙한 얼굴에 모자를 눌러썼는데 소 돌보는 일이 곧 끝난다며 잠시만 기다리라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향동네 승현이 아버지를 닮았다. 

 승현이 아버지는 말이 어눌한데다 행동까지 마뜩하지 않다. 농사를 짓느냐고 지어도 남는 게 별로 없다고 늘 투정이다. 수박농사가 짭짤한 해에는 참외를 심고, 고추가 비쌀 것이라고 심으면 되레 값이 내려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현이네와 거꾸로 하면 돈을 번다고 농을 건다. 

 잠시 후 소 외양간에서 나온 남자는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미안해한다. 장화를 벗더니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라고 방으로 내 손을 잡아끈다. 그러더니 선뜻 아랫목을 내어주고는 씻지도 않은 손으로 덥석 냉장고 문을 열더니만 음료수 한 잔 따라 낸다. 농촌이라 대접해 줄 게 없다며 또 미안해한다. 

 고향을 떠올리게 하며 향수를 달래주는 발산리. 어떤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나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아궁이에서 갓 꺼낸 군고구마 같은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을 보았다. 내 몸에서도 젖소 냄새가 났다. 

 그런 발산리지만 한 옆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불 켜진 사무실이 보인다. 동네 입구에 세워 놓은 차를 얼른 끌어다 뉘어놓아야겠다. 


 * 발산리 : 청주시 사천동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농촌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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