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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Oct 29. 2023

오늘은 날고 싶다

감성 수필

 

     

     

     

  한 남자가 빨강 카펫 위에서 말랑말랑하게 마술을 빚는다.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가 풀리고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비밀의 문이 열린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마술사의 눈속임에 관객들은 허기를 느낀다.

  남자 마술사는 농무(農舞)할 때 등장하는 상모 형상의 특이한 모자를 쓴 데다 얼굴엔 탈까지 쓰고 있다. 마술 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는 복장이다. 뒤이어 등장한 여자 무용수도 마술에 걸린 듯 짧은 치마와 브래지어만 걸쳤다. 살집도 적당하고 피부색도 복숭아 빛깔처럼 고와 저절로 의자를 끌어당기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리따워 보이는 무용수의 얼굴에도 엷은 네모 조각의 미색 종이가 드리워져 있어 본모습을 궁금하게 한다.

  트럼펫이 감정이 메말라버린 몸 구석구석을 자극해 가며 집요하게 마음을 간질인다. 개울물 소리가 나고 폭포수가 흐르는가 싶더니 때론 빗방울을 뿌린다. 무용수의 몸도 음의 높낮이에 맞춰 출렁인다. 춤을 추는 건지 관능미를 보이는지 알 수 없는 그 현란한 몸놀림에 관객들은 허기를 느낀다. 흐느적거리는 낙지처럼 꿈틀댄다.  

  세상은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것이라 했던가. 밤무대 가수들도 마음의 빗장을 걷어내고 응어리진 사연을 풀어놓는다. 구경꾼들마저 스텝이 꼬이고 박자가 맞지 않아도 삶의 바다에 육신을 내려놓는다. 촘촘하게 엮인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흥건하게 몸을 섞는다. 그런데도 내 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경험하는 것도 재미인데 그들만의 잔치인양 지켜보고만 있다. 예를 차리며 구경만 한들 누가 나를 점잖은 사람이라고 봐주겠는가.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수없이 갈등한 세월. 체면치레 하느라 눈치만 보던 얼룩들이 언뜻언뜻 스친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풀이 죽은 어린애처럼 주변의 눈치만 봐 오지 않았던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숨어버리던가. 그게 아니라면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못 해 먹겠다며 책상에 발길질이라도 하던가. 자리에 연연하다 발바닥에 각질만 켜켜이 쌓아온 나 자신을 본다. 흘려보낸 세월이 눈앞에 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태양이 이글거리던 날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맞이한 여름방학 때 면에서 주최하는 동네 대항 축구대회에 참가했었다. 우리 팀은 기량을 과시할만한 선수가 몇 되지 않아 1회전도 통과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첫 시합에서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고 심지를 뽑아 운 좋게 2회전에 오르자 오기가 발동했다. 한 경기 한 경기 이어갈 때마다 나는 시합에서 진 타 동네 선수들을 끌어들였다.  

  얼굴이 찢어지고 다리를 절뚝거려도 교체할 선수가 마땅치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핑계거리였다. 아예 처음부터 부정선수를 넣지 않았으면 몰라도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누가 보건 말건 실력이 처지는 애를 부상당해 뛰지 못한다며 심판을 불러 세웠다. 이기고 있는 시합을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속임수의 전말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그 전말이 드러나면 그때 가서 해결하자고 호기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가슴 졸였던 연극은 준결승전을 치르고 나서야 무대에서 내려졌다.

  인간의 행동이 꼭 타고난 성격에 의해서만 좌우될까? 하나의 골과 목표를 위해 심판의 눈을 속여 가며 타 동네 선수를 끌어들이듯,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고 상대방에게 염치없이 매달리듯,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장님이 되는 병에 걸려 수용소에 갇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파리의 대왕'에 나오는 무인도에 갇힌 어린 소년들처럼 진짜로 섬에 갇힐 수도 있다. 1971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필립 짐바로드 교수가 평범한 대학생들을 모집해 교도소 생활을 체험케 하며 행한 ‘환경 조작에 따른 심리변화 실험’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양면성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갓난아기일 적에는 영혼이 때 묻지 않아 순수하더라도 세상과 타협하면서 점점 추레해진다. 험한 산길을 넘어왔거나, 그와 반대로 호사를 누리며 살아온 사람이거나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누구나 가면을 쓴다. 목적과 이유가 어찌 되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마다 무엇인가를 숨기고, 거짓말하고 아닌 척한다. 자신의 허술한 모습은 감추고 마주하는 상대의 기를 꺾을 요량으로 가면놀이를 한다.

  인류가 옷을 입은 건 에덴의 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상상일까. 옷이 추위를 막아주고 피부를 자외선으로부터 보호하는 목적도 있지만, 그것 말고도 자신의 못난 모습이나 행동을 숨기는 도구로도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닌지. 마술사나 무용수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나오듯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할 상황이거나 불안에 떨 때마다 풀을 뜯고 나뭇잎을 엮어왔을 것 같다. 요즘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점이나 열등감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천으로 몸을 가리고 얼굴에 화장하며 지내는지도 모를 일이다.  

 밤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린다. 그 소리에 놀라 어둠의 저편에서 돌아온다.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기 위하여 마련된 축제의 마당이지만 그런 것은 상관 안 하겠다는 듯 판이 흥건하다. 행사를 주최하는 기관에서 경품까지 내걸었으니 밤이 깊어가도 무대와 관객이 하나가 된다. 살살이꽃길을 걷거나 임시로 마련된 음식점에서 얼큰하게 술 한 잔 걸친 객꾼까지 합류해 판이 얼큰해진다. 나른한 오후가 눈뜨고 서늘해져 가는 저녁이 달아오른다.

  내 몸도 덩달아 그 속으로 빨려든다. 이 순간만큼은 탈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 어떤 사악한 가면 놀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야누스의 악몽에서 빠져나와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흐느적거리고 그저 신명을 다해 춤추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면 깨끗한 영혼이 자리할 것이다. 시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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