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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Nov 04. 2023

백두산 천지

     

                                                         

  맑고 쾌청한 날에도 백두산 천지(天池)는 안개천지 구름천지라 못 본 사람 천지라는데.

  심양까지 비행기로 날아와 환인과 통화를 거치고 고구려인이 말 달리던 집안과 연길을 지나면서도 천지로 달려가는 즐거움에 피곤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시여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도록 궂은 날씨는 얼씬도 하지 말게 하소서’ 마음속으로 깃발을 올리며 기도하였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사람들은 천지 사진을 벽에 걸고 컴퓨터 바탕화면에까지 깔아놓는가. 애간장 끓게 하고 보고 싶어 조바심 나게 하는 천지(天地).

  우리나라 땅덩어리는 8시간이 넘도록 기차를 타고 달릴 곳이 없는데 천지를 보려면 지금까지 거쳐 온 것 말고도 연길역에서 저녁 9시 45분에 열차를 타고 새벽 5시 40분까지 이도백하역까지 밤새도록 달려가라 한다. 4인 열차 침대칸도 감지덕지, 내일의 행운을 잡으려면 어서 잠자리에 들어 피곤한 몸을 풀어야 하는데, 열차표를 적게 예매하는 바람에 일행 중 여인네 둘과 남정네 둘이 침대칸을 같이 쓰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뒤척이느니 술이라도 마시자며 밤잠 못 자고 억지로 비운 술병 천지.

 열차 관리들이 쓰는 세수간에서 고양이세수로 눈곱을 떼고 열차에서 내리니 어디서 들 그렇게 몰려왔는지 천지를 보러 온 한국 사람들 천지.

  속이 쓰리고 허기까지 몰려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조선족이 운영하는 고구려식당으로 들어가 김치와 깍두기는 기본이요, 콩나물을 무쳐놓고 산나물과 버섯도 볶아 놓았다. 매일 마다 음식에서 나는 그들만이 즐기는 향 때문에 곤혹스러웠는데 한 첨 한 첨 젓가락으로 입질을 해보니 내 입맛을 어찌 아는가. 무장아찌와 짠지며 계란으로 찜을 하고 갓 만들어낸 두부를 간장과 곁들여 내놓으니 우리네 식탁과 다를 게 없다. 거기다 감자와 김치를 같이 넣고 끓인 국에 옥수수를 넣은 밥까지 먹고 후식으로 토마토와 숭늉까지 마시고 나니, 이게 어디 이국땅인가. 이래저래 식탁 입에 맞는 음식 천지.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데, 그곳에 내리면 한 포기의 꽃과 식물을 꺾지 말란다. 돌멩이 하나라도 들고 나와도 안 되며, 천지 곳곳에 돌 부스러기가 쌓여 있어 가장자리를 밟으면 주르르 미끄러져 몸도 천지가 될지 모른단다. 거기다 한 수 더 떠 백두산이 우리네 것이지만 중국에서 천지를 4/10 정도를 관할하고 있기에 중국 공안이나 감시원들이 항상 따라붙으니 그들의 정서와 사상을 거슬리게 하는 말도 삼가란다. 하여간에 모든 것을 조심하라는 여행 안내자의 잔소리 천지.

  백두산 천지 굽이굽이 오르는 길엔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오돌토돌한 보도블록을 깔아놓았다. 그 길을 거무칙칙한 정복을 차려입은 중국 운전사들이 커브 길을 무시하며 굉음이 나도록 지프를 몬다. 타이어 타는 냄새가 풀풀 나도록 핸들을 잡아 돌리며 여행객들을 짐짝 취급한다. 공중화장실이 있는데도 온천으로 유도하려고 화장실 문에다 X자로 나무를 대못질해 이용하지도 못하게 하질 않나, 천지 정상을 오르는 입구에도 ‘돈을 왕창 벌자!’ 같은 구호의 글귀를 새겨 놓고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아우성이다. 이래저래 ‘흰 고양이이건 검은 고양이건 간에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의 등소평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외치며 무슨 수라도 돈을 벌려는 중국 사람들 천지.

  천지에 올라가기 전에는 날씨가 맑다고 해도 시간대에 따라 기상 변화가 심하다 보니 처음 올라 단번에 천지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것은 운이 매우 좋은 거란다. 백두산 안내원도 맑은 천지 모습을 열 번을 올라야 고작 한두 번 볼 정도란다. 화창한 천지의 모습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그러는데 누가 나에게 복을 내려 줬나. 한반도에서 가장 높으며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는 백두산. 애국가 가사에도 있듯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백두산엔 기분이 좋아 입이 벌어진 사람들 웃음꽃 천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온천이 나타나고 험준한 봉우리가 병풍을 친다. 천지로 오르는 양 길가엔 다른 나무들은 어디로 가고 자작나무 천지. 거기에다 갖가지 취와 원추리와 고비가 널려져 있다. 발을 높일수록 만병초인 구절초와 수천만 빨간 좀참꽃이 수를 놓아 장관이다. 백두산 천지는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빼고는 겨울이라 하는데 백두산은 꽃을 품었다. 여행 온 지금 6월은 꽃 천지 별천지.

  천지에 오르기 전 높은 봉우리가 벌거벗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다 눈이었다. 남한은 한여름이라 땡볕이 내리쬐는데 천지 주변엔 눈이 쌓여 있었다. 천지엔 녹지 않은 눈 천지.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사진을 찍느라 카메라 셔터가 연실 터진다. 다들 사진에 담기려 아우성, 이래저래 천지엔 볼 것 천지, 신기한 것 천지.

  정상에 있어도 왜 이리 가슴이 시려 오는가. 가까이 있어도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북녘 땅!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전날 압록강에서 통통배를 타고 북녘의 산하를 돌아보았지만 간절한 마음 천지. 손바닥으로 전해오던 압록강 물줄기의 시림이나 감촉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을 텐데, 초소를 지키던 낯 모르던 병사들의 모습에서 지워지지 않는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천지.  

  백두산 정상에 태극기를 꽂을 수 없다. 꽂을 수 없다. 보이는데 달려갈 수 없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손을 잡을 수도 없다. 같이 여행 온 일행들과 막걸리라도 부어놓고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도록 소원을 빌고 싶은데 현실이 그렇지 않아 가슴이 찢어진다.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동포들아! 내가 왔어. 내가 왔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주변엔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고구려 후손들은 먹는 음식이나 풍습을 계승하며 지내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 드높였던 만주벌판은 아주 먼 곳에 있다. 백두산 천지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우려하고 놓인 처지가 불쌍해 눈시울 젖는 대한민국 사람들 천지. 만만세 부르는 그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 사람들 천지.

  천지(天地), 천지(天池)에 우리 것 천지, 백두산 만만세. 어서 그날이.


                  (『수필과 비평 2007. 7~8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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