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입시 지옥
대학원은 입사 지옥
대학은 나와야 하는 데
대학원은 나와도 되는 데
딸애의 손가락을 차마 두 눈 뜨고 바라보지 못했다. 오른손 검지가 사고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 붕대로 친친 싸매져 있었다. 딸애는 상해 입은 손가락을 그저 움켜쥐고만 있다. 손톱 주변에 거스러미만 생겨도 짜증을 내던 아이였는데, 손톱이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갔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딸애는 우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샘이 떠진 듯했다.
딸애는 상처투성이인 손가락을 부여잡고 병원에서 응급조치받은 후 입사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볼펜을 쥐는 오른손 검지 손톱의 불편함을 무릎 쓰고 시험 지문을 읽고 계산기를 누르고 답을 적어 내려갔다고 했다. 오죽하면 아이는 입사 시험을 치르며 영혼까지 팔았다는 말을 할까. 영혼을 팔아서라도 입사하겠다고.
아이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와 아내는 주말농장으로 얻은 텃밭에서 무를 수확하는 중이었다. 딸애는 사고 직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와 아내를 찾았지만 그날따라 공교롭게 둘 다 핸드폰을 집에 놓아두고 오는 바람에 연락이 될 리 만무했다. 아이는 다급해 제 오빠에게 연락했고, 우리 내외는 한참 뒤에 큰애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이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시험장 인근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그렇게 목적지에 닿은 뒤 일이 벌어졌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가 채 내리기도 전에 택시가 출발한 게 원인이었다. 택시를 타고 내리다 보면 옷이나 가방이 문틈에 걸릴 수 있지만 문틈에 손가락이 끼이고 말았다. 아이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 정신이 없었는지 택시 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는 시험을 보지 못할 것을 더 걱정했다. 피가 줄줄 흐르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병원을 찾았다. 응급실에서 손톱을 뽑아내고 수습하는 수술을 받으면서도, 아이는 시험 치를 회사 인사과에 전화를 걸어 사고 상황을 전했다. 수술 가위가 눈앞에서 서걱서걱 우는 소리를 내도, 뼈마디까지 통증이 스멀거리는 아픔을 애써 참으며 시험장에 늦게 입실하게 되더라도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딸애는 원래 고등학교 시절 문과(文科) 분야 공부를 했다. 많은 수의 여학생들이 이과보다는 문과를 택하듯, 아이 또한 또래들과 평범하게 여고 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대학에 원서를 낼 때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인문 계열 분야는 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취업문이 좁다. 그런 난제(難堤)를 풀고자 여러 날 고민해도 답을 찾기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해에는 교차지원제도가 있었다. 이는 공부한 분야가 달라도 원하는 학과를 바꿔 지원할 수 있다. 문과 전공생이 이공계 학과를, 이공계 전공생이 문과 관련 학과를 응시할 수 있다. 물론, 교차 지원하면 학력고사 점수에서 성적 감점의 페널티가 따라도 취업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재주도 있고 그쪽 분야에 재능도 있어 식품 연구 개발 쪽을 공부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딸애는 며칠 고민 끝에 나의 뜻을 따랐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그에 관한 공부가 부족하다 하여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고민하며 취업의 문을 두드려왔는데, 그 결과물을 볼 수 있는 날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요즘 들어 아이는 물 먹은 솜이불처럼 축 처져 지낸다. 오죽하면 제 엄마한테 앞날에 대한 점을 봐 달라고 조를까. 점집에도 갈 수 있다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거라고 믿었던 아이가, 제 오빠보다 배포가 컸던 아이가 시험 후유증에 시달린다. 스트레스에 소화불량으로 밤잠을 설친다. 툭하면 감기로 몸살로 앓아눕는다. 캠퍼스의 불편한 진실 앞에 아이는 떨고 있다. 이력서에 붙일 이력을 이력이 나도록 쓰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잠을 설친다. 불멸의 밤을 보낸다.
살다 보면 비가 오고 눈 내리고 바람도 분다. 가는 길에 구름도 낀다. 취업의 문이 바늘 구명 같아도 아이의 잠재력을 믿는다. 지금까지 입사 원서를 냈던 기업과는 인연이 아니라고 둘러대고 싶다. 겨울이 지루할 것 같지만 참고 견디면 봄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아이의 정원에도 조만간 탐스러운 꽃이 필 걸 기대해 본다.
누구에게나 자리가 있다. 그 사람에게 맞는 자리. 지지고 볶고 살아도 그 사람을 위한 자리. 명분을 내세우건 실리를 좇든 그건 각자의 선택이지만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자리. 아이가 앉을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