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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당 Sep 09. 2023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生)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뒤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위 시는 송수권 시인이 2006년 계간『詩向』봄 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 발표했으니 애잔함이 더하다. 그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시인 송수권은 설거지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부엌 풍경을 그려낸다. 숟가락 하나 젓가락 둘, 혼자가 된 처지를 드러낸다. 밥 먹고 설거지하고 나서 엎어 놓은 밥공기가 꼭 무덤을 닮았다며 세상과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예견한다.

 <혼자 먹는 밥>을 쓴 송수권 시인은 1940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2016년에 세상과 이별을 고한다. 시인은 1975년『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를 발표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어린 시절 계모 밑에서 자랐던 터라 설움을 많이 받았고 배고프게 살았다고 했다. 시인은 스물네 살 때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애틋했던 동생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그 젊은 나이에 동생을 떠나보내고 난 빈자리의 슬픔을 삭이고자 그 감정을 시로 토해냈다고 했다.   

  요즘은 개성의 시대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음악을 듣는다. 붙어 지내는 사람이 있어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도 혼자 있고 싶어 한다. 남의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늘려간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음악을 듣고 노트북을 켜고 볼일을 본다.  

  그런 젊은이들에 비해 나이 들어 보니 음식점이나 커피숍에 혼자 있기가 쉽지 않다. 혼자 밥을 먹거나 차 한 잔 마시려면 꽤 용기가 필요하다. 한 번은 누구와 약속하고 커피숍에서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난처한 적이 있었다. 둘셋이라면 모를까. 혼자서. 더군다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면.

  최근 싱가포르에서는 어떤 노인이 매주 식당을 찾아 8인분을 주문하고는 홀로 식사한다는 사연이 공개되었다. 주문한 음식이 다 나와도 그의 식탁은 늘 혼자였다고 한다. 옷차림도 멀쩡하고 불안 증세도 없는데 왜 혼자 식사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하면, 노인은 식사가 끝나면 주변을 깔끔하게 정돈했고, 자신의 몫만 먹고도 음식 값 전체를 지불하였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혼자서 밥을 먹으면 그 연유가 있겠거니 하는데, 나이 들어 혼자 식탁에 앉아 있으면 시선은 달라진다. 설익은 밥을 넘길 때처럼 그 사람의 처지를 곱게 보지 않는다. 사별했거나, 배우자가 있어도 혼자 지내거나, 자식들이 있어도 찾지 않는 사람이라며 애처롭게 바라본다. 그의 쓸쓸함을 덜어주고 싶다며 속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자신만 그리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하는 것을 보면 나 또한 젊은 층의 시선을 피해 갈 수 없는 나이인가 보다.    

  창문으로 스미는 달빛에 시인의 마음은 흔들린다. 시인은 그릇을 깨는 날이 늘어남에 탄식한다. 선반의 밥공기와 접시가 줄어듦을 보고 자기 살점이 점점 깎여 나가는 것 같다는 시구(詩句)에 내 마음도 흔들린다. 그릇을 깨면 다시 사 채워 놓아도 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며 절규하는 시인의 눈길이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같이 밥 먹어 줄 사람 없는데 그릇을 새로 장만하면 뭐 하냐 하며 깊은숨을 몰아쉬는 시인과 마주했다면 무슨 말로 위로했을까.  

  혼자 밥을 먹는 시인의 식탁 풍경은 쓸쓸하다. 독 가장자리를 집으면 고뇌와 허무가 배어날 것 같은 나이임에도 그의 식탁엔 아무도 없다. 상에 놓인 반찬이며 손에 들고 있는 놋숟가락마저 차갑게 얼어붙는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위로될 텐데 그의 식탁엔 냉기가 가득하다. 가족이 옆에 있어야 그런 냉기가 줄어들거늘 시인의 식탁은 늘 비어 있다.

  시인은 여럿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린다. 단 며칠이라도 누군가와 같이 밥 먹고 싶다고 독백한다. 소설 <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 선생도 삶의 느지막에 원주에 정착하면서 글을 쓸 때만큼은 살아 있다고 회상했다. 바느질할 때 살아 있고, 풀을 뽑고 씨앗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지만 서쪽 창을 통해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선생은 스며드는 적막감을 피부로 느끼며 ‘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라며 노년의 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밥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밥을 같이 먹는 건 한 끼의 식사를 넘어 그와 함께 호흡하는 거다. 냉기를 덜어내고 따스함을 채우는 나눔의 의식이다.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은 그리움을 넘어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 사람과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 사람과 같이 있던 사람들의 삶을 알게 하는 일이다.  

  새근새근 코를 골며 고이 잠든 아내를 바라본다. 어깨가 결린다 하고 팔이 쑤셔 파스를 붙여 달라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도, 점점 삭아가는 저 끈마저 내게서 떨어지면 지독한 외로움을 무엇으로 견디나 고민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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