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시 세끼 밥을 먹으면 ‘삼식이’요, 겁 없는 남편이라고 놀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십 년 단위로 나누고 풍자와 해학을 들먹거린다. 사람들의 입에서 밥이 자주 오르내리는 건 밥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밥을 위해 존재한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밥 앞에서 약해진다. 밥 앞에 평등 없고 밥 앞에 체면 없다. 밥의 무게에 따라 추가 기울고 밥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쏠린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흘러가는 말일지라도 그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음을 말해준다. 힘들어할 때마다 손잡아 준 적이 있고, 눈물 빼는 순간에 손수건이라도 꺼내주는 아량을 베풀었기에 상대방이 내게 그런 인사말이라도 건네는 것이다. 어쨌거나, 밥 한 번 먹자거나 소주 한잔하자라는 말을 들으면 어깨가 가벼워진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도 밥으로부터 출발한다. 밥이 연결 고리를 만들어준다. 근본은 사랑이지만 밥에 의해 관계가 맺어지고 밥을 위해 손가락을 건다. 밥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과 여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동행한다 해도 그 길이 순탄하지 않거니와, 불꽃같은 열정도 풍선에 바람 빠지듯 금세 쪼그라든다. 그 관계가 지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상대가 지닌 밥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얼굴이 미운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직장이 없으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세상, 밥그릇 크기에 따라 울고 웃는 부침을 계속한다.
지금은 남녀평등을 넘어 여자 상위 시대로 움직여가고 있다.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나 가전제품도 여자의 마음을 녹여야 인기가 있다. 생활공간인 집이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교통여건과 학군까지 좋으면 일품(一品)의 자격을 얻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여자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명품(名品)에서 멀어진다.
밥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건 누구든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세상을 자기편으로 만들게 하는 힘도 밥이다. 사람들은 밥을 쫓아 움직인다. 밥 든 자리에 사람 들고 사람 든 자리에 밥 든다. 그 사람이 가진 밥그릇 크기에 따라 주변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떠나간다. 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이파리 내밀고 꽃을 피우다 낙엽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생명들 말고는 없다고나 할까.
밥, 그 단어만 떠올려도 힘이 솟는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밥, 일 음절의 단어지만 힘이 느껴진다. 여러 단어가 모여 이룬 문장처럼 조화를 부리고 감동을 준다. 어떤 말이 필요하랴. 글에 갖은 형용사나 부사를 붙여 감정이나 상상을 자극하지만, 밥은 그 어떤 수식어조차 필요하지 않다. 밥은 단어 자체로 생명력이 있다. 살아 움직인다.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물음의 표시를 욕망이라는 단어로 표한다면, 욕망의 원점은 밥이다. 삶의 출발점이며 꼭짓점이다. 밥은 돈과 같이 욕망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돈만큼 속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돈만큼 치사한 생각을 들지 않게 한다. 돈이 형이하학적이라면 밥은 형이상학적이다. 돈은 절박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밥은 그보다는 너그러워 보인다. 돈은 거칠고 건조한 느낌이 들게 하지만 밥은 촉촉한 느낌이 있다. 감싸 안는 포용력과 흡수력이 있어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둘러앉게 한다.
밥은 요기를 넘어 생활의 에너지원이다. 생식의 기본이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서게 하는 힘도 밥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자존을 위해 밥은 필요하다.
오늘도 밥상 앞에 앉는다. 내일을 준비하려 밥상으로 다가간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것은 내가 감수해야 할 시간이고, 하루하루가 변화 없이 흘러가는 것은 내가 넘어야 할 산이지만, 그보다 눈앞에 있는 과제는 밥이다. 이 세상 소중한 것 중에 첫 번째가 밥이 아니고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