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이라는 이름의 가학적 유희, 샤덴프로이데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을 향한 질투는 왜 이토록 집요할까.
일본에는 "出る釘は打たれる"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나온 못은 얻어맞는다"는 이 짧은 문장은 탁월함이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사회적 폭력을 관통한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말이 있지 않던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사람들은 흔히 "남들은 생각보다 당신 인생에 관심 없다"라고 위로하지만, 그건 평범한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세상은 평범함에는 무관심할지언정, 집단의 평균을 위협하는 탁월함 앞에서는 사냥개처럼 돌변해 이빨을 드러낸다.
소문은 공기 중에 흩어지는 먼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목을 겨냥해 정교하게 깎아 만든 화살이다. 그 화살촉에 묻은 독이 사실인지, 아니면 정성껏 가공된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쏠 수 있는 명분만 있다면 충분하다.
이 지독한 유희의 중심에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기괴한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 독일어로 '해(Schade)'와 '기쁨(Freude)'이 합쳐진 이 단어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은밀한 쾌락을 뜻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이 감정의 추악함을 이렇게 말했다.
"Neid zu fühlen ist menschlich, Schadenfreude zu genießen teuflisch."
"질투를 느끼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은 악마적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이 악마적인 쾌락에 중독되어 있다.
뇌과학적으로도 타인의 몰락을 목격할 때 우리 뇌의 보상 회로인 '배 측 선조체'가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그 대상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일 때, 사람들은 그의 추락을 보며 자신의 비루한 처지가 '실패'가 아닌 '안전'이었다는 가짜 위안을 얻는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저 사람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어"라는 비아냥은, 사실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자존감을 방어하려는 비겁한 절규에 가깝다.
결국 탁월함에는 반드시 '질투'라는 이름의 세금이 붙는다.
그 세금이 가혹할수록 당신이 가진 가치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문 때문에 소진되어 무너지는 것은 그들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다.
그들은 당신의 실력이 가짜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가 꺾이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할 뿐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그 가혹한 검증의 칼날 위에 서 있다면 기억하라.
당신을 향한 집요한 견제는 역설적으로 당신이 그들의 세계를 위협할 만큼 거대한 존재가 되었다는 훈장이다. 세상의 무관심보다 무서운 것은 비겁한 자들의 집요한 관심이겠지만, 진짜 탁월함은 그 모든 소음이 잦아든 뒤에 비로소 고요하게 증명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