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글 써클렌즈에 얽힌 비화
고양이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흰자위가 드러나지 않은 동그란 눈 말이다. 때로는 동공의 개구가 확대되어서 홍채까지도 뒤덮어버린 깊은 검은빛으로, 때로는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점 하나로 수축된 동공으로 마주 앉은 인간을 응시한다. 동공과 홍채만 드러나는 단추눈. 둘째는 고양이 가을의 눈이 동그랄 때 귀여워서 안아주지 않고는 견디기가 어렵다며 호들갑을 떤다. 밝은 곳에서는 동공의 개구를 줄여 망막에 달하는 빛의 밝기를 줄이고, 어두운 곳에서는 반대로 빛을 담기위해 동공을 크기를 조절한다는 것은 익숙하게 들었으나, 좋아하는 것을 보면 동공이 커지고 싫은 대상앞에서는 오무라든다는 사회적 신호로도 작용한다는 글을 읽었다.
인간의 눈은 흰자위라고 하는 공막과 동공으로 더 익숙한 가시홍채를 담은 홍채가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눈길의 이동을 숨기기 어렵다. 위계질서의 작용이 눈길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겸손, 복종, 경멸, 위협, 곁눈질, 수즙음, 가벼운 놀라움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이 있다. 관계의 역학 속에서 지배성을 띄는 인물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가기도 하는 것처럼.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의 사회적 신호는 눈을 마주하고도 서로의 호감도를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의 종류이거나 도발의 뉘앙스를 가지기도 한다 .
나의 십 대를 돌아보면 오싹한 일이 있다.
그 무렵 여러 경로로 나에게 흘러든 쌈지돈의 팔 할은 '써클렌즈'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늘 상비하는 것에 쓰였다. 써클렌즈는 렌즈에 인쇄된 크기만큼 홍채가 커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즉 눈동자를 커 보이게 하는 미용목적의 렌즈이다. 그것의 가격이라는 것이 학생의 신분으로 충당하기에는 부담이 큰 축이었므로 렌즈의 유효기간을 훌쩍 넘겨 사용하다가 시뻘겋게 충혈이 되거나 눈동자에 염증반응이 일어 통증을 수반하더라도, 집을 나설 때 인격을 교체하듯 렌즈 착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성적은 뒷전이고 '성쩍'관심과 외모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은 엄마의 호된 평가와 핍박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삼엄하게 경계하며 이어오던 지극히 은밀하던 나의 사생활은 얼마가지 못해 "흐리멍텅한 생선눈알같다" 혹은 "약에 찌든 애처럼 눈알이 왜 그러하냐"와 같은 엄마로부터의 살벌한 평가로 난도질을 당하는 것을 고사하고서라도 동공의 개구가 맥시멈으로 확장된 눈알없이는 스스로의 가치가 평가절하 될 것만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
물론 그 때는 몰랐거니와 알았더라도 동물의 그것과 같은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을 정보들을 , 렌즈의 잉크가 자리하는 위치는 산소 투과가 원천 차단되는 탓에 일반렌즈에 비해 산소투과율이 매우 낮고, 눈의 영양 공급을 공막에서 대부분 끌어와야 되는 탓에 지나치게 오래 착용하면 오히려 실제 눈동자 크기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라던가, 가시홍채와 흰자위로 부르는 공막의 경계선이 모호해진다는(출처: 나무위키),한 숨에 읽어내리며 십 대 당시 스스로 설계하고 가둔 중독성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느 아침 첫째가 종알거린다.
"엄마 귤은 대략 15알정도, 자두는 5알 정도, 참외는 2알 정도를 먹으면 질려. 하루에 필요한 총량을 채운거지. 나는 과일이 있으면 일찍일어나. 하루가 기대되니까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침대에 조금 더 누워 있겠어" 라고 과일을 부엌에 쟁여달라는 말을 굳이 치렁치렁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지랄총량의 법칙에 대해 생각한다. '과일을 너무 많이 먹으면 설사한다'는 종류의 잔소리가 없어도 귤 15알 정도로 스스로 질리는 일인냥 내 십 대의 지랄을 귀엽게 보아 넘기기로 한다. 적어도 심각한 안질환으로 이어지기 전에 스스로 각성하고 환골탈태와 같은 양상으로 지금의 나는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으므로.
어쩌면 그것은 한 때 흐릿하던 눈동자와 흰자위의 경계에 가닿고 나서야 경계라함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감각임을 피부로 느끼는 것, 낡은 나와 대치하며 한거풀 벗어낸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과 같다. 기본적으로 시각적이고 감각적이며 사랑 앞에 무력하고 무모한 인간. 무모함에 스스로를 갉아먹히면서도 무해한 나를 사랑하라며 타자의 세계를 배회하지만 결국 나로 돌아와 멈칫한다. 고양이의 무해한 매력은 커다란 동공에 있지 않다. 다정한 그루밍을 눈치보며 다른 것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다거나, 시시각각 변모하는 감각에 충실한 솔직함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언제든 날 세우고 스스로를 지킬 배짱일찌도 모르고. 물성을 띈 뼈와 같은 유연함이 배후에 있는 것도 같고. 아 모르겠다. 오늘도 저 어디 건천의 마른 나뭇잎 위에서 구르다 느긋하게 드러낼 귀하고 부드러운 몸짓과 털 뭉덩이나 쓰다듬어야지.